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3.04.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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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3-04-23 | 조회수53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23년 4월 23일 부활 제3주일 복음 루카 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폭력은 신체적 폭력도 있지만 정신적 폭력도 있습니다. 이 둘 중에서 어떤 폭력이 더 무서울까요? 사실 뇌에서는 똑같은 크기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신체적 폭력을 당할 때 고통을 느끼는 뇌 부위가 활성화되는데, 인간관계에서 거절당하고 따돌림을 당할 때도 똑같은 부위가 활성화됩니다. 이렇게 신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은 똑같습니다. 둘 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이레놀 등의 진통제를 먹으면 이별의 고통이나 왕따로 인한 괴로움도 훨씬 완화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정신적 폭력도 신체적 폭력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적 폭력으로 인간관계가 깨질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 우리에게 이는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을 뇌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큰 아픔을 주었다고 다시는 안 보겠다고 다짐해보지만, 마음은 너무나 불편하지 않습니까?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주님께서 아픔과 상처를 주신 것처럼 책임을 몰면서 주님을 믿지 않으며 멀리하겠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과연 몸과 마음 모두 편안할 수 있을까요? 그럴수록 주님과 함께해야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침통한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고향 엠마오로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예수님을 향해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루카 24,18)라고 말하면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만이 예수님을 경멸하기 위해 쓰던 호칭이었지요. 그만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께 실망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며 고향 엠마오로 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믿음이 없으니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요. 그러나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60스타디온을 함께 걸었습니다. 스타디온은 그리스식 길이 단위로 계산하면 약 11.5km 정도입니다. 걸어서 두 시간 정도의 거리지요. 두 시간 동안이나 함께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 시간을 믿음이 굳어지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즉,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알아보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 많은 고통과 시련을 주는 육체적 정신적 폭력이 난무합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라면 즉,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다면 그 폭력의 상황에서도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가장 힘센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생텍쥐페리)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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