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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영근 신부님의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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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23 조회수614 추천수1 반대(0) 신고

 

230423. 부활 제3주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오늘은 부활 3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오순절 날에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의 일부입니다. 이 설교에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고”(사도 2,24), 예수님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사도 2,27)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받아서 <화답송>의 시편에서는 “주님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나이다.”(시 16,11 참조)라고 노래합니다.
 
<제2독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약 30년이 지나서 베드로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주셨음”(1베드 1,28)을 말합니다.

<복음>은 예수님 부활의 모습을 드러내주시는데,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곧 당신의 제자들이 믿음을 지켜내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섬세하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들이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들은예수님의 죽음으로 희망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 이전의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혹 우리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동행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느지 들여다 보아야 할 일입니다.
 
절망과 슬픔에 빠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의 표면만 보고서 절망에 빠져,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바로 그 순간은 위기의 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때가 자신들의 걸었던 희망과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때가 바로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요,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믿었던 일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앎과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죽었다’는 그 앎과 그래서 그분께 걸었던 믿음이 무너져버린 일에서 벗어나, 다시 알아듣고 새로이 믿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우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시며”(루카 24,27), 슬픔에 젖은 그들의 어루만지시어 “마음이 타오르게”(루카 24,32)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이 타올랐으나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는 못한 채 응답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루카 24,30)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그 깊은 사랑이 그들의 어둠을 비추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마치 ‘말씀의 전례’로 마음이 타오르고, ‘성찬의 전례’로 말씀이신 분을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떼어내다’는 단어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라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수심으로 당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신비, 곧 부활의 신비를 보는 눈은 이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부활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을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곧 나의 믿음이 부서지고 당신의 믿음이 들어설 때입니다. 나의 희망이 부서지고 당신의 희망이 들어서고, 나의 사랑이 부서지고 당신의 사랑이 들어설 때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부서지고 으스러뜨려질 질 때, 우리는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그런데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루카 24,31).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루카 14,31). 그러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여전히 살아계신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여전히 동행하시며 그들이 당신을 증언하도록 동행하십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붙드시고 지켜주시기 위해, 참으로 감동적으로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의 슬픔과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하메나 놓칠까 우리의 손을 꼭 붙들고서 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깊고 깊은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그분의 손을 빠져나가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이 길에서 당신 ‘말씀’으로 마음이 타오르고, 마음의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부활생명을 보는 눈이 열려,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뿜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이미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늘 데리고 다니시기”(2코린 2,14)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6)
 
주님!
저는 고통을 없애주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고통을 함께 지라 하십니다.
저는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평화를 위해 일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부패를 비난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라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어둠을 탓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빛이 되어 밝히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제 가까이 오시어 곁에서 함께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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