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24 부활 제3주간 월요일...독서,복음(주해)
이전글 부활 제3주간 월요일 |3|  
다음글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1|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23 조회수345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그들은 스테파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6,8-15
그 무렵 8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
9 그때에 이른바 해방민들과 키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10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11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우리는 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2 또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을 부추기고 나서,
느닷없이 그를 붙잡아 최고 의회로 끌고 갔다.
13 거기에서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이런 말을 하게 하였다.
이 사람은 끊임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합니다.
14 사실 저희는 그 나자렛 사람 예수가 이곳을 허물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준 관습들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15 그러자 최고 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스테파노가 체포되어 최고의회에서 고발당하다

스테파노가 체포되어 최고의회에서 고발당한 이야기와 순교한 이야기는 원래 하나로 전헤져 네려왔는데, 루카가 그것을 둘로 나누고 그 사이에 스테파노의 연설을 삽입했을 가능서이 크다.

스테파노의 체포과 고발 이야기와 순교 이야기에도 루카의 가필 부분이 상당히 많다. 마르코와 루카에 수록된 예수 수난사화와 일치하는 부분은 거의 다 루카의 가필이라 생각한다.

 

8

스테파노는 기적과 표징도 행하고 설교도 했다. 앞의 단락을 고려하면 그가 식탁에 봉사했다고 말한 것도 같은데, 여기 단락에는 전혀 그런 말이 없다.

 

9

스테파노의 적수들은 해외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회당을 세우고 정착한 헬라계 유다인들, 또는 일시적으로 귀환한 헬라계 유다인들이다. “자유인들은 전쟁포로로 붙잡혀 갔다가 석방되어 귀향한 이들이었다. “키레네는 북아프리카, 지금의 리비아에 있는 도시로서 거기에는 유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북아프리카, 지금의 이집트 항구 도시로서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해외 유다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칠십인역 그리스 성서를 펴내고 필로 같은 석학을 배출한 곳이다. 에페소 교회와 고린토 교회에서 활약한 명설교가 아폴로도 알렉산드리아 태생 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다. “길리기아의 수도 다르소는 사도 바오로의 출생지다. “아시아는 에페소 주변 지역이다.

 

11

모세를 모독하는 말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거역하는 독성죄를 가리킨다. 13-14절에서는 스테파노가 성전과 율법을 거스르는 말을 했다고 거짓 증인들이 증언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거짓 증언을 할 수 있는 구실을 스테파노가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다교의 성전과 율법 자체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루카의 구세사적 구도構圖에 따라 만민을 위한 보편적 구원이 더 이상 성전과 율법을 토대로 형성된 유다교 안에만 갇혀 있을 수 없음을 증언했을 뿐이다. 스테파노가 성전을 비판한 내용을 참조하라(7,48-50).

 

14

나는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어 버리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를 루카는 나름대로 다음어 이곳을 헐고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 준 관습들도 다음어 이곳을 헐고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 준 관습들도 고칠 것이다라고 개작했다. 실상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고, 거짓 증인들이 예수께 뒤집어씌운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마르코도 사도행전 필자 루카도 주장한 사실에 유의하라.

 

15

나는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어 버리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를 루카는 나름대로 다듬어 이곳을 헐고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 준 관습들도 고칠 것이다라고 개작했다. 실상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고, 거짓 증인들이 예수께 뒤집어씌운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마르코도 사도행전 필자 루카도 주장한 사실에 유의하라.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께서 비록 마르 14.58처럼 말슴하시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성전과 율법에 관하여 비판적 발언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일곱 지도자들은 예수의 비판정신을 계승했을 것이다.

 

 

 

 

 

 

 

 

 

 

 

 

 

복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2-29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22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22

예수가 빵의 기적을 행했던 호수의 동편.

16-17절 참조.

 

23

11절 참조. “주님이라는 그리스도론적 칭호는 부활한 예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편집 때 추가되었을 것이다. 일부 사본에는 주님께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이란 말이 없다.

 

24

17.21절 참조.

 

25

예수를 라삐라고 부르는 것도 직접 무엇인가를 듣고 배우고자 하는 원의를 시사한다.

당시 상황에 걸맞는 표현이다. 그러나 독자에게는 예수가 홀로 물 위를 걸어온 것을 상기시킨다.

 

26

계시 내용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 예수의 말씀을 계속 이끌거나 묻는 말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강조하는 구실을 한다.

 

예수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의 생각이나 태도를 알고서 그것을 들추어낸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체험한 빵의 기적만을 언급한다. , 제자들만이 물 위를 걸은 예수를 체험했음을 시사한다. “표징을 본다란 예수의 행위에서 신적 의미를 파악한다는 뜻이다. 기적의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파악한다는 뜻이다. 기적의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신앙의 눈으로 보고 파악함을 가리킨다. 예수를 찾아온 이들에게는 빵의 기적이 아직 그런 의미로 파악되지 못했다는 것이 지적된 셈이다.

 

27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길이 남아 있을 양식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약속된 양식으로 언급된다. 이 양식은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양식으로서 이른바 길이 남아 있을 양식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양식이며 사람의 아들이 주게 될 양식이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서 문맥상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의 아들을 뜻한다.

 

따라서 이 양식은 다시 하늘로 올라간 사람의 아들이 주게 될 천상적 선물이다. 따라서 이 양식은 다시 하늘로 올라간 사람의 아들이 주게 될 천상적 선물이다. “사람의 아들이 줄 것입니다라는 미래적 표현이 이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 양식은 구원의 선물로서 먹고 마시도록 제공될 예수의 살과 피”,곧 성체성사적 선물로서의 음식과 음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맥상 예수 자신이 계시한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빵을 배제할 수는 없다.

 

,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자는 현존하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며 또한 예수 자신이다. 이 예수는 세상에 생명을 주기 때문에 자신이 곧 구원의 선물을 주는 분이요, 또한 자신을 음식과 음료로 제공하기 때문에 다시 하늘로 올라간 사람의 아들로서 구원의 선물 곧 영원하 생명을 주는 분이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 줄 양식이란 신적 생명을 지는 예수 자신과 그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과 동시에 성사적 음식과 음료와도 관련된 표현이라고 폭넓게 봐야 한다.

 

28

예수의 말을 오해한 질문이다. , “힘쓰시오란 말을 오해하여 일들로 생각한 것이다, 사실상 하느님의 일들은 하느님 자신의 행위익,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그것을 이해하고 찬미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다만 하느님에 의해 요구되는 을 뜻할 뿐이다.

 

29

하느님의 일들이 예수의 대답에서는 단수형태. 하느님의 일로 언급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은 곧 당신이 파견한 이를 믿는 것 하나뿐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이 파견한 이를 믿는 인간의 행위 또는 태도다. 바로 이것을 하느님은 원하시며, 이것을 하느님의 원의에 따라 행하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다. “하느님의 일로서의 믿음이 인간의 성과가 아니라 하느님의 원의에 따른 인간의 태도 또는 행위로 부각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돈까스 좋아하시나요? 돈까스는 영어로 Pork Cutlet 라고 하는데 일본식으로 (돼지) 가쓰레쓰로 부릅니다. 저는 돼지고기를 저민 뒤 튀김을 입혀 튀기는 돈까스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여기에서도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돈까스가 일본식 이름이라고 무조건 싫어하시지 말고 우리도 한번 찾아 봅시다. 수퍼등지에서는 돈(money)냄새가 난다고 장갑을 끼고 동전을 세기도 하지요. 이 돈이 그 돈은 아니지만요.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우리 언어로 돈까스를 한자어와 영어로 합쳐서 불러봅니다. 그렇다면 돈(돼지)와 가스로 이루어져 있으니 확 벌쩍뛰어, 그렇다면 돈가스를 돼지 방귀라 불릴만도합니다. 그러니 에너지가 귀할 때에 돼지 배설물을 모아서 발효가 된다면 거기에서 나오는 가스를 사용해본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이제 집옆에 구덩이를 파서 돼지똥을 모으고 거기에서 나오는 가스를 사용한다면 좋을 듯한 에너지원이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경제효과도 있을 것이다고 보는 것이지요. 배설물 처리에도 좋구요. 흐르는 물에다 버려서 오염시키지 말고 줄여보자는 것입니다.

 

.............................................................................................................................................................................................................................
다음은 고등학교 시절얘기입니다. 저는 새를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어느날인가 물새 새끼를 잡아와서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물새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로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비를 잡아서

먹는다는 것을 알고 온 밭을 뛰어다니며 비자루로 나비를 잡아서 먹였습니다, 아주 잘 먹더군요.

그래서 공부는 저리가라하고 나비 잡기에 바빴습니다. 새끼는 내가 쯔쯧쯔하는 소리를 내면 따라옵니다.

그러면 나비를 먹이곤 했습니다.

 

나는 노래를 했습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라 오너라 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다들 아는

노래이지요. 세월은 한참을 흘러 삼십초반이었는데 어느날 사람이 많은 곳을 걸어서 지나가는데 뒤에서

두명의 아가씨가 나의 귀에 예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을 합니다, “나비야 나비야....” 그래서 나는 그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서 빙긋이 웃었습니다. 이 아가씨는 술집 여자이고 나를 지금 초대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몇십년이 지나고 보니 선생님을 뜻하는 랍비 또는 라삐가 우리말로는 꼭 나비처럼도 들리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가중에 “..고양 이시며가 나오는 노래가사가 나오는데 고양은 한자어로 어린양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당시 우리들은 흔히들 고양이를 나비라고 불렀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지는 알수 없지만요.

 

지금 심정은 그 당시 아가씨가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이건 무엇을 하는 사람이건 한번이라고 모습을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