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27)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 (창세16,1-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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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24 | 조회수403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27) 2023. 4. 24. 월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
(창세16,1-16) 1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는 그에게 자식을 낳아 주지 못하였다. 사라이에게는 이집트인 여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은 하가르였다. 2 사라이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여보, 주님께서 나에게 자식을 갖지 못하게 하시니, 내 여종과 한자리에 드셔요. 행여 그 아이의 몸을 빌려서라도 내가 아들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아브람은 사라이의 말을 들었다. 3 그리하여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는 자기의 이집트인 여종 하가르를 데려다,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주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자리 잡은 지 십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4 그가 하가르와 한자리에 들자 그 여자가 임신하였다. 그 여자는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제 여주인을 업신여겼다. 5 그래서 사라이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렇게 부당한 일을 겪는 것은 당신 책임이에요. 내가 내 여종을 당신 품 안에 안겨 주었는데, 이 여종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업신여긴답니다. 아, 주님께서 나와 당신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셨으면!” 6 아브람이 사라이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손에 달려 있지 않소. 당신 좋을 대로 하구려.” 그리하여 사라이가 하가르를 구박하니, 하가르는 사라이를 피하여 도망쳤다. 7 주님의 천사가 광야에 있는 샘터에서 하가르를 만났다. 그것은 수르로 가는 길 가에 있는 샘이었다. 8 그 천사가 “사라이의 여종 하가르야,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저의 여주인 사라이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9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여라.” 10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의 후손을 셀 수 없을 만큼 번성하게 해 주겠다.” 11 주님의 천사가 또 그에게 말하였다. “보라, 너는 임신한 몸 이제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여라. 네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다. 12 그는 들나귀 같은 사람이 되리라. 그는 모든 이를 치려고 손을 들고 모든 이는 그를 치려고 손을 들리라. 그는 자기의 모든 형제들에게 맞서 혼자 살아가리라.” 13 하가르는 “내가 그분을 뵈었는데 아직도 살아 있는가?” 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님의 이름을 “당신은 ‘저를 돌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라고 하였다. 14 그리하여 그 우물을 브에르 라하이 로이라 하였다. 그것은 카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다. 15 하가르는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아브람은 하가르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다. 16 하가르가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 줄 때,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 살이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도 신앙이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12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룰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만 믿고 고향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가나안땅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 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당장 그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자 종 엘리에젤을 양자(養子)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느님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종(奴)이 아니라 이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밤하늘의 뭇별을 보여주시면서 네 자손이 이 별과 같이 많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믿으니 하느님께서 의(義)로 여기셨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에게 의문이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말씀은 믿겠는데 가나안땅에 대한 약속은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쪼갠 고기 사이로 하느님의 횃불이 지나가는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대신하여 쪼갠 고기처럼 피흘려죽더라도 나는 네게 대한 이 말씀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가나안땅을 차지하는 일정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네 자손이 애굽으로 갔다가 400년이 지난 후에 이 땅으로 돌아와 이 가나안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였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만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은 환상을 보기도 했습니다. 또 전쟁에서도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환상도 보지 못했습니다. 체험도 못했습니다. 단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어느 가정에서 남편이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여보 하느님께서 내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 그래서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뭐야 당신은 말씀을 통해서 확신을 가졌지만 나는 아직 그런 확신이 없어” 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사라가 이와 같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많은 자손을 이루려면 아브라함 혼자 하지 못합니다. 사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라는 하느님 말씀을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남편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그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은 듣는다고 되지 않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들어도 그 말씀이 내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같은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라가 그와 같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느님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지 못했습니다.
(창세16,1) 1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는 그에게 자식을 낳아 주지 못하였다. 사라이에게는 이집트인 여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은 하가르였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부터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따라서 가나안땅에 와서 10년을 기다렸는데도 출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 여종은 애굽 사람이고 하갈이었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많은 재물과 노예를 얻었는데 그때 얻은 종이었습니다.
(창세16,2) 2 사라이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여보, 주님께서 나에게 자식을 갖지 못하게 하시니, 내 여종과 한자리에 드셔요. 행여 그 아이의 몸을 빌려서라도 내가 아들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아브람은 사라이의 말을 들었다.
이것은 고대근동 당시의 풍습이었습니다. 본처가 자녀를 낳지 못하면 여종을 통해서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녀가 내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사라는 10년을 기다려도 자녀가 없자 야훼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야훼께서 사라의 출산을 이미 출산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자기 마음대로 하느님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내 생애에 나를 통해 자녀를 보는 것은 끝났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내 여종에게 들어가 자녀를 낳으라고 합니다. 또 사라는 많은 자녀가 있게 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녀를 낳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이지 방법은 어떤 것이든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세기15장에서 하느님께서 네 몸을 통해서 난 자를 통해서 많은 자녀를 주신다고 하셨기에 여종을 통해서 자녀를 낳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한 이유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가나안땅에 온지 10년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16,3) 3 그리하여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는 자기의 이집트인 여종 하가르를 데려다,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주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자리 잡은 지 십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래서 10년의 시간동안 아브라함과 사라가 너무 오래 기다렸기에 너무 지쳐 있습니다. 그래서 여종을 통해서라도 자녀를 낳으려했습니다.
(창세16,4) 4 그가 하가르와 한자리에 들자 그 여자가 임신하였다. 그 여자는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제 여주인을 업신여겼다.
이제 갑과 을의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라가 갑이었는데 하갈이 임신하자 하갈이 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주인 사라를 멸시(蔑視)합니다. 멸시한다는 것은 먼지처럼 가볍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창세16,5-6) 5 그래서 사라이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렇게 부당한 일을 겪는 것은 당신 책임이에요. 내가 내 여종을 당신 품 안에 안겨 주었는데, 이 여종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업신여긴답니다. 아, 주님께서 나와 당신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셨으면!” 6 아브람이 사라이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손에 달려 있지 않소. 당신 좋을 대로 하구려.” 그리하여 사라이가 하가르를 구박하니, 하가르는 사라이를 피하여 도망쳤다.
하갈의 이름의 뜻이 도망하는 자인데 하갈이 사라에게서 도망합니다.
(창세16,7) 7 주님의 천사가 광야에 있는 샘터에서 하가르를 만났다. 그것은 수르로 가는 길 가에 있는 샘이었다.
여기서 주님의 천사는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 하갈은 내가 하느님을 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천사(使者)가 묻습니다.
(창세16,8-11) 8 그 천사가 “사라이의 여종 하가르야,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저의 여주인 사라이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9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여라.” 10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의 후손을 셀 수 없을 만큼 번성하게 해 주겠다.” 11 주님의 천사가 또 그에게 말하였다. “보라, 너는 임신한 몸 이제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여라. 네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다.
하느님께서는 하갈을 통해서도 많은 자녀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하갈의 고통소리도 들으시고 이스마엘을 허락하셨습니다.
(창세16,12) 12 그는 들 나귀 같은 사람이 되리라. 그는 모든 이를 치려고 손을 들고 모든 이는 그를 치려고 손을 들리라. 그는 자기의 모든 형제들에게 맞서 혼자 살아가리라.”
이 이스마엘이 지금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의 조상입니다. 이들도 하느님의 말씀대로 크게 번성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느님말씀대로 들 나귀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들을 치고 또 이들은 자신의 모든 형제와 대항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이슬람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두 파로 나누어져서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슬람사람들은 그의 형제인 이사악의 후손들과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과 사라가 15년만 더 참고 기다렸으면 지금의 중동전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기다리지 못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결국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아닙니다.
(창세16,16) 16 하가르가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 줄 때,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 살이었다.
왜 여기서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라고 합니까? 그이유가 창17장1절에 있습니다.
(창세17,1) 1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
아브라함이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니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3년 동안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기다리지 못한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형벌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아무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서로 싸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최고의 정점은 기다림이라고 했습니다. 또 신앙은 기다림과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기다림을 인내(忍耐)라고 합니다.
(히브10,36) 36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기까지 25년을 기다려야했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후 왕이 되기까지 15년을 기다려야했습니다 하박국도 유다나라에 하느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20년 이상 기다려야했습니다. 욥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 끝까지 인내하고 기다렸습니다. 이에 대해서 야고보서에서 ~
(야고5,11) 11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기다리는 자가 복(福)이 있습니다. 또 기다리는 자에게 기도의 응답을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40편2절에 “주님께 바라고 바랐더니 나에게 몸을 굽히시고 내 외치는 소리를 들으셨네.”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릴 줄 알아 됩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 모든 복과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1)조급함을 버려야합니다. 조급함은 사탄의 초청장입니다. 티모테오2서 3장에 말세(末世)에 사람들은 조급하다고 합니다.
(2티모3,1.5) 1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마지막 때에 힘든 시기가 닥쳐올 것입니다. 5 겉으로는 신심이 있는 체하여도 신심의 힘은 부정할 것입니다.
조급하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문제를 더 크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조급함을 버리기 위해 우리마음에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편4편 2절에서~ (시편4,2) 2 제 의로움을 지켜 주시는 하느님 제가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소서. 곤경에서 저를 끌어내셨으니 자비를 베푸시어 제 기도를 들으소서.
우리마음에 하느님께서 하실 일을 조급해서 기다리지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 일을 당장 인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 “주여 내 마음에 여유를 주소서, 내 마음이 조급하지 않고 느긋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으로 아무리 여유를 가지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하느님 지금내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이여 내 마음속에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여유를 주십시오”라고 하느님께 기도하기 바랍니다. 은혜(恩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우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낙심하여 넘어져 있을 때 나를 일으켜주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도 응답이 없을 때 나를 지치지 않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응답이 없더라도 나를 여유 있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오직 믿음으로 기다려야합니다. 그리스도교적 기다림과 유교식 기다림과 불교식 기다림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유교식 기다림은 이빨을 깨물면서 참을 인(忍)자를 마음에 천번 만번 세기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또 불교식 기다림은 아무 소망이 없이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적 기다림은 기쁨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편40,2) 2 주님께 바라고 바랐더니 나에게 몸을 굽히시고 내 외치는 소리를 들으셨네.”
여기서 ‘바라고’라는 단어가 “카바”인데, 이것은 아무 소망 없이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빨을 깨물고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기다림이란 어떤 일이 일이 이루질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기쁨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도 앞으로 잘 될 것을 믿고 미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을지라도 장차 모든 것을 이루실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말씀을 듣고 이루실 줄을 믿고 미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데 현실에서 정반대의 말이 들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느님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들리는 말이 있습니다. 사라가 “여보 우리가 10년이나 기다리지 않았어요? 그러니 우리는 안 돼, 그러니 내 여종을 통해서 자녀를 낳읍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느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르코복음5장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러 가는 길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이때 두려워하고 있는 야이로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5,36)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딸이 죽었다)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또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이중 명령으로 모두 현재 진행형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서 믿기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현실가운데서 죽음의 소식이 있어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까지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을 현재가운데도 계속해서 지니고 있어라 는 말씀입니다. 또 이것은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시고 회당장에게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신앙은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현실은 우리가 믿었던 것과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때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만들어서 결국 망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불의한 현실이고 불신앙의 현실이지만,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그 약속이 수년이 지나도 보이지 않아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희망가운데 기쁨으로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하느님의 자비(긍휼)를 믿고 기다려야합니다. 이 이스마엘 자손들이 아랍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여기서 하갈을 자비로이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스마엘을 이 땅에 태어나지 않게 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중동전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는 이스마엘을 태어나게 하시고, 그로 번성하게 하신 것은 하갈의 고통소리를 들으신 하느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아니라 하더라도‘그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셨고’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긍휼(矜恤 불쌍히)이 여겨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하갈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하갈을 불쌍히 여겨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그것은 택하신 백성이 아닌 자도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택하신 자녀들에 대해서 더 자비롭게 여겨주지 아니하시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그냥 자비하심이 아니라 자비가 풍성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에페2,4).
(에페2,4-5) 4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하갈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하갈을 자비로이 여기신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를 더 자비롭게 여겨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의 고통소리와 신음소리를 반드시 들으십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있을 때 그들의 고통하며 신음하는 소리가 하느님께 상달(上達)했습니다
(탈출2,25) 25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
여기서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는 말씀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고통소리를 들이시고, 단순히 그들을 생각만 하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처지를 알게 되셨다’는 말은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같이하시면서 이제 그 고통의 현장에 하느님께서 직접 함께해주시겠다는 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구원시켜주신 것은 하느님께서 직접 이스라엘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해주셔서 그들과 직접 함께 해 주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로우심, 긍휼(矜恤불쌍히 여김)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지금이 순간 다른 사람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까? 저위에 계신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고통을 들이시고, 같이 아파하시고, 괴로워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나도 지금 너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머리털 끝 하나라도 다 세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의 조그마한 생각, 고통, 억울함도 다 감지하시는 분이십니다. 단순히 아파하시는 것만 아닙니다. 그 고통의 현장에 하느님께서 친히 나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고통의 현장에 우리의 신음소리를 들이시고,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한나의 고통하며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에게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신음하며 고통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인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입니다. 하갈이 구원받지 않은 자라도 자녀를 위하여 고통하며 눈물 흘릴 때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여겨주셨는데, 하물며 하느님께서 택하신 하느님의 백성들이 자녀를 위하여 고통하며 눈물로 기도할 때 더 자비로이 여겨주시기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 현실은 하느님께서 당장 응답해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자비(慈悲)를 믿고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신 것이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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