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5 화요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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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24 | 조회수53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주로 안티오키아와 키프로스,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기원후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고 난 뒤인 65년에서 70년 사이에 주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로마에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이 복음서는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되었다. 제1독서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12 나는 성실한 형제로 여기는 실바누스의 손을 빌려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주해 5절 여기서 뜻밖에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왜 그럴까? “마찬가지로”된 말을 쓴 것으로 미루어, 필자는 5ㄱ절에 어떤 기운을 옮겨쓴 것 같다. “장로”를 뜻하는 프레스뷔테로스에 “어른”이란 의미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본디 가훈에서 말하는 어른은 이 문맥에서 “장로”에 해당하지 여기 젊은이들은 일반 교우를 가리킨다. 장로들을 지도자로 받들라는 말이다. 5ㄴ절의 “모두”는 장로들과 선지자들이다. 필자는 신약의 공동생활에서 겸손을 근본적으로 중요한 태도로 본다, 즉, 예수를 본받아, 모두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호간에 받들어 섬겨야 한다는 뜻이다. 잠언(LXX)3.34를 인용함으로써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한다. 겸손하고 깨어 있는 사람이 되라 5,6-11은 이 서간의 마지막 훈계다. 이 문단에 보이는 개념들은 야고 4,6-10과 아주 비슷한 사실로 미루어, 두 필자는 하느님을 섬기고 악마를 물리치라는 주제를 다루는 데 같은 전승자료를 이용했을 것이다. 6절 5ㄷ절의 “겸손한 자들”에 대한 언약을 두고 이제 결론적으로 “하느님의 능하신 손 밑에 자신을 낮추십시오”라고 한다. “하느님의 손”은 역사 과정 안에 숨어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뜻하고, “자신을 낮추라”는 것은 현재의 어려운 처지를 단련을 위한 시련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 어려움을 통해 하느님이 심판도 하시고,, 은총도 베푸시기 때문이다. 7절 “내맡기십시오”를 직역하면 “내던지십시오”이다, 모든 근심을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듯 쉽게 처리하실 수 있는 하느님께 내맡기라는 의미다. 8절 지금까지 필자는 시련이 하느님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주장했지만 이제는 “적수인 악마”를 그 둘째 원인으로 지적한다, 하느님이 활동하실 때 동시에 악의세력도 암약한다는 것을 예수께서도 가르치셨다. 그 세력을 물리칠 힘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자세다. 9절 9ㄴ절은 다른 신도들도 같은 처지에 있으니 고난을 “괴이한 일”로 여기지 말고 꿋꿋이 견디라는 말이다. 10절 하느님은 모든 이의 어떤 치지든 당신의 은총으로 감싸 주시기 때문에,“모든 은총의 하느님”이시다. 이 은총은 “뽑힘”을 통해서도, 신도들이 겪는 시련을 통해서도 주어진다. 끝맺는 인사 고대 서간의 끝맺음는 양식은 아주 간단했지만(“건강을 빕니다”: 2마카 11.21.33: 또는 “안녕히 계십시오”: 사도 15.29 참조) 필자는 바오로가 그러했듯이 이 양식을 그리스도교적인 말로 부연했다. 12절 “실바노”는 예루살렘 교회 출신으로 바오로의 협조자가 되었다. 그가 로마로 갔다면 거기서 얼마 동안 활동한 베드로를 만났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실바노를 시켜”썼다는 말은 이 서간이 베드로의 친서가 아닌 경우 실바노 자신이 이 서간의 필자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충실한 교형”이란 말은 자신을 높이는 말이 아니라 베드로를 존경하고 그의 사상을 충실히 전달한다는 뜻일 것이다. 13절 “바빌론 교회”는 아마 로마교회일 것이다, “나의 아들인 마르코”라 하는데, 이런 부자 관계의 상징어는 신약성서에서 유다인 풍습대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뜻하기도 한다, 마르코는 신약성서에서 언제든지 사도 12,12-17에서 말하는 요한 마르코다.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바오로의 협조자가 되어 얼마 동안 그와 동행했고 한때 갈라졌다가 후에 다시 바오로와 함께 지냈다. 그리고 바오로가 죽은 후에 베드로와 함께 일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14절 일반 서간의 인사와는 다르다. 인사는 여기서 단순히 예의상의 말이 아니라 수신인들을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표현이다, “사랑의 입맞춤으로 인사하는” 것은 아마 만찬례 때의 평화의 인사일 것이다. 14ㄴ절의 축원은 바오로의 편지에서와 같이 하느님의 은총을 비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비는” 것이다. 평화는 하느님과의 친교뿐 아니라 신자들간의 친교도 뜻한다. 복음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주해 15절 루카 24.47; 사도 1.8 참조; 마태 28.19. 복음의 골자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16절 복음선포에 대한 반응은 믿음 아니면 불신이다. 믿음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결단이다. 이 결단을 내린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는 것을 뜻하는 상징적 행위, 곧 세례를 수락하게 마련이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종말에 구원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멸망할 것이다. 요한 3,3,18에도 믿음과 세례와 구원의 상관관계가 드러난다. 17절 17-18에서는 신앙인들에게 다섯 가지 기적적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네 가지는 사도행전에서 따온 것 같다. 구마이적, 언어이적, 독사이적, 치유이적, 음독이적만은 신약성서 밖의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가이사리아 주교 에우세비우스는 유스투스 바르사바스에 관해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치명적인 독을 마셨지만 주님의 은혜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교회사 3.39.9). 19절 루카 24.50-63; 사도 1,9-11, “올라가시고”를 직역하면 “맞아들여지고”(수동형). 하느님이 예수를 승천케 했다는 뜻이 들어 있다. 20절 20절은 전도활동 집약문. 마태 28.20 참조. 히브 2,1-4 참조.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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