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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8 부활 제3주간 금요일...독서,복음(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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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글 매일미사/2023년 4월 28일[(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28 조회수431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

<그는 민족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9,1-20
그 무렵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

아직도라는 말로써 루카는 사울의 회심에 관한 이 이야기를 8,1-3에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이 구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를 사울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사울이 대제관에게 가서 요청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해줄 편지였다. 루카는 예수 또는 예수 운동을 파괴하려는 유다교 지도층과 노력을 끊임없이 보고한다.

 

2

루카는 다마스커스에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밝히지 않는다. 갈릴래아 선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대제관들이 이같은 소환장을 발부할 권한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구약성서에서 은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은유다. 이같은 의미는 신약성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루카는 이 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한다.

 

3

빛의 출현은 하느님의 현존과 연결된다. 빛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신현神現을 가리킨다.

 

4

빛에서 나오는 소리는 출애 3.4에 가시덤불에서 나오는 소리와 출애 19,16-20의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들은 소리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분명히 생존해 계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예는 루카 8.24;10.41; 22.31에서도 발견된다.

 

5

바오로는 신현만을 인정할 뿐이지 아직 주님이 예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현시 안에서의 대화는 독자로 하여금 현시의 메시지를 더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기능을 지닌다.

어떤 사본들에는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되어 있다. 예수라는 본명을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대로 사용한 점에 유의할 것, 새로운 형태로 더 큰 권능을

지닌 채 살아 계시는 분, 그리고 그분의 추종자들과 동일시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 자신이시다. 바오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활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6

이야기의 중심요소는 예수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바오로에게 부여된 소명이다. 그리스도인 박해에 위세를 떨쳤던 바오로가 이제는 무력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힘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그 힘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7

이 사건을 다룬 세 기록이 서로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여기서는 바오로의 동행자들이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22.9에서는 동행자들이 빛을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한편 26.14에서는 모두 땅에 엎어지나, 이 대목과 22.7에서는 바오로만 엎어진다.

 

9

3일 동안 장님이 된 것은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천상빛을 육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3일 동안의 단식은 소명을 받기 전의 준비를 가리키거나 내적인 참회기간을 의미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단식은 계시를 받기 전의 준비기간과 연결되거나 참회와 연결된다.

 

10

10-16절에는 새 장면이 소개되는데, 주인공은 그리스도와 아나니아다. 이 구절에서 아나니아에게 붙여진 제자칭호는 그가 그리스도인임을 가리킨다. 그는 13절에서 암시하듯 다마스커스에 정착한 히브리인이다. 아나니아의 대답은 순종의 표시로서 사무엘의 대답과 비교된다.

 

그러나 하느님을 처음에 잘 몰라본 사무엘과는 달리 아나니아는 주께서 부르실 때 즉시 알아본다. 22.12에서 바오로는 아나니아를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현시를 통한 계시는 루카가 즐겨 쓰는 문학 기법이다.

 

11

바른 길유다의 집등 구체적 묘사는 이 대목이 실제사료에 바탕했다는 추측을 낳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저자가 유능한 이야기꾼임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도와 단식은 흔히 함께 연결된 신심행위다.

 

13

아나니아의 주저함은 이해가 가지만 주님의 명령은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는다.

 

15

바오로의 선교활동을 요약한 청사진이 여기 제시된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아그리빠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로마 황제 앞에서도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바오로는 계속하여 동료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다.

 

16

고난을 받아야 한다라는 표현은 바오로를 예수나 모세와 같은 수난하는 예언자들의 반열에 직접으로 들게 한다. 바오로의 행적을 언제나 성공적으로

묘사하는 루카가 그의 수난을 처음부터 예고한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17

여기서는 안수가 치유를 가져오고 성령을 내려주는 일에 연결된다. 아나니아가 안수를 하며 사울를 형제로 부르는 것은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18

비늘 같은 것들은 그리스어 부사 “...와 같은이 덧붙여졌기 때문에 실제적인 현상을 가리키기보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다. 장남이었던 바오로가 이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오로의 눈을 멀게 했던 빛은 이제 역설적으로 영적인 장님 상태에서 그를 구해 주었다.

 

19

바오로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고 음식을 먹음으로써 다시 정상적인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다.

 

20

바오로는 즉시 유다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루카는 바오로가 언제나 회당에서 설교하기 시작하고 거기서 쫓겨났을 때만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고 전한다. 바오로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소명을 받은 후 아라비아로 건너갔다가 나중에 다마스커스로 돌아왔다. 바오로가 예수께 대해 선포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칭호는 사도행전에서 이곳에만 직접 언급된다.

 

 

 

 

 

 

 

 

 

복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2-59
그때에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52

예수의 말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

예수의 말이 의미없고 이해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게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을 오해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을 먹으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예수의 계시 말씀을 외형적으로만 듣고 오해 또는 불신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이 드러난 셈이다.

 

53

성체성사적 식사를 가리키는 이 구절에서부터 성체성사적 선물에 관한 가르침이 본격적으로 언급된다. 예수의 참된 음식이요 참된 음료이며, 먹고 마시는 이에게 생명을 주고,또한 신적 생명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다. 58절에서는 생명의 방에 관한 말과 성체성사적 선물에 관한 가르침을 연결하면서, 예수의 살과 피는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빵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재확인한다.

 

특히 53절은 문맥상 유다인들이 제기한 이의에 대한 강도 높은 표현이다: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셔야 한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들어높여진 천상적 사람의 아들이다. 비로 이 천상적 사람의 아들이 성체성사적 선물을 주는 신적 생명의 전달자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란 표현은 예수의 살과 피의 실재성을 강조하면서, 성체성사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지상 예수의

 

육체적인 살과 피가 아니라 천상적 사람의 아들의 영으로 가득 찬 살과 피임을 가리키는 데 역점이 있다. 그러나 성사적으로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신앙인은 천상적으로 현존하는 그리스도와 지상에 와서 살았던 예수가 동일함을 고백한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구원의 원천으로서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과 을 취해 인간 가운데 오신 역사상 구세주를 증언한다.

 

이제까지 삼인칭으로 언급되던 표현이 일인칭, 내 살”,“내 피로 언급됨으로써 예수의 자기계시가 더 강조된다. ,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는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곧 예수 자신의 살과 피라는 것이다.

 

성체성사적으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얻은 영원한 생명은 종말 부활 때 완성된다.

 

55

먹고 마시는 행위보다 먹고 마시는 이 안에 지속되는 생명에 역점이 있다. 예수의 살과 피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계속 누릴 수 있게 하는 진실한 음식이요 음료라는 것이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고, 성체성사적 선물을 취한 신앙인만이 그 생명의 약속을 가지게 된다.

 

56

성체성사적 선물을 취한 신앙인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일치를 이룬다는 뜻이다. 성체를 취한 신앙인에게 약속된 생명이 바로 이런 일치를 통해 성취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는 자체가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이루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일치다.

 

57

하늘의 빵”,“생명의 빵”, “하느님의 빵등으로 표현된 말과 상징적인 살과 피의 이중적 표현이 이제 라는 인격적 표현 안에 통합되어 나를 먹는다로 언급된다. 그리하여 성사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그리스도 자신과 살아 있는인격적 일치를 이루기 위한 특별한 방법이라는 점도 시사된다.

 

아버지는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에 살아 계시는분이고, 아버지는 또한 아들을 파견하여 그 안에 생명을 가지도록 하셨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다”. 이렇듯이 아들고 이제 성체성사 안에서 자기를 먹는신앙인, 곧 자신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에게 바로 그 생명을 주어 자기로 말미암아살게 한다.

 

58

생명을 주는 아들을 가리킨다.

33절과 50절에 언급된 예수의 자기계시 내용과 관련시킴으로써 빵 안에서 실재로 죽음을 이겨내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성체성사적 가르침은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의 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도 시사한다.

 

49-50절 참조. 일부 사본에는 조상들이 만나를 먹고도 ... ”또는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고도...”

51ㄱㄴ절 참조.

 

59

예수의 생명의 빵에 관한 말과 성체성사적 가르침이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저자는 보도한다(24절 참조). 이로써 역사적 신빙성도 제시하고자 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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