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8 부활 제3주간 금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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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28 | 조회수431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그는 민족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주해 1절 “아직도”라는 말로써 루카는 사울의 회심에 관한 이 이야기를 8,1-3에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이 구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를 사울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사울이 대제관에게 가서 요청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해줄 편지였다. 루카는 예수 또는 예수 운동을 파괴하려는 유다교 지도층과 노력을 끊임없이 보고한다. 2절 루카는 다마스커스에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밝히지 않는다. 갈릴래아 선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대제관들이 이같은 소환장을 발부할 권한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구약성서에서 “길”은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은유다. 이같은 의미는 신약성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루카는 이 “길”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한다. 3절 빛의 출현은 하느님의 현존과 연결된다. 빛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신현神現을 가리킨다. 4절 빛에서 나오는 소리는 출애 3.4에 가시덤불에서 나오는 소리와 출애 19,16-20의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들은 소리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분명히 생존해 계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예는 루카 8.24;10.41; 22.31에서도 발견된다. 5절 바오로는 신현만을 인정할 뿐이지 아직 주님이 예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현시 안에서의 대화는 독자로 하여금 현시의 메시지를 더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기능을 지닌다. 어떤 사본들에는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되어 있다. 예수라는 본명을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대로 사용한 점에 유의할 것, 새로운 형태로 더 큰 권능을 지닌 채 살아 계시는 분, 그리고 그분의 추종자들과 동일시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 자신이시다. 바오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활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6절 이야기의 중심요소는 예수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바오로에게 부여된 소명이다. 그리스도인 박해에 위세를 떨쳤던 바오로가 이제는 무력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힘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그 힘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7절 이 사건을 다룬 세 기록이 서로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여기서는 바오로의 동행자들이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22.9에서는 동행자들이 빛을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한편 26.14에서는 모두 땅에 엎어지나, 이 대목과 22.7에서는 바오로만 엎어진다. 9절 3일 동안 장님이 된 것은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천상빛을 육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3일 동안의 단식은 소명을 받기 전의 준비를 가리키거나 내적인 참회기간을 의미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단식은 계시를 받기 전의 준비기간과 연결되거나 참회와 연결된다. 10절 10-16절에는 새 장면이 소개되는데, 주인공은 그리스도와 아나니아다. 이 구절에서 아나니아에게 붙여진 “제자” 칭호는 그가 그리스도인임을 가리킨다. 그는 13절에서 암시하듯 다마스커스에 정착한 히브리인이다. 아나니아의 대답은 순종의 표시로서 사무엘의 대답과 비교된다. 그러나 하느님을 처음에 잘 몰라본 사무엘과는 달리 아나니아는 주께서 부르실 때 즉시 알아본다. 22.12에서 바오로는 아나니아를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현시를 통한 계시는 루카가 즐겨 쓰는 문학 기법이다. 11절 “바른 길”과 “유다의 집”등 구체적 묘사는 이 대목이 실제사료에 바탕했다는 추측을 낳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저자가 유능한 이야기꾼임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도와 단식은 흔히 함께 연결된 신심행위다. 13절 아나니아의 주저함은 이해가 가지만 주님의 명령은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는다. 15절 바오로의 선교활동을 요약한 청사진이 여기 제시된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아그리빠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로마 황제 앞에서도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바오로는 계속하여 동료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다. 16절 “고난을 받아야 한다”라는 표현은 바오로를 예수나 모세와 같은 수난하는 예언자들의 반열에 직접으로 들게 한다. 바오로의 행적을 언제나 성공적으로 묘사하는 루카가 그의 수난을 처음부터 예고한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17절 여기서는 안수가 치유를 가져오고 성령을 내려주는 일에 연결된다. 아나니아가 안수를 하며 사울를 형제로 부르는 것은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18절 “비늘 같은 것들”은 그리스어 부사 “...와 같은”이 덧붙여졌기 때문에 실제적인 현상을 가리키기보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다. 장남이었던 바오로가 이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오로의 눈을 멀게 했던 빛은 이제 역설적으로 영적인 장님 상태에서 그를 구해 주었다. 19절 바오로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고 음식을 먹음으로써 다시 정상적인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다. 20절 바오로는 즉시 유다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루카는 바오로가 언제나 회당에서 설교하기 시작하고 거기서 쫓겨났을 때만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고 전한다. 바오로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소명을 받은 후 아라비아로 건너갔다가 나중에 다마스커스로 돌아왔다. 바오로가 예수께 대해 선포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칭호는 사도행전에서 이곳에만 직접 언급된다. 복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주해 52절 예수의 말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 예수의 말이 의미없고 이해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게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을 오해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예수의 계시 말씀을 외형적으로만 듣고 오해 또는 불신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이 드러난 셈이다. 53절 성체성사적 식사를 가리키는 이 구절에서부터 성체성사적 선물에 관한 가르침이 본격적으로 언급된다. 예수의 “살”과 “피”는 “참된 음식”이요 “참된 음료”이며, 먹고 마시는 이에게 “생명”을 주고,또한 신적 생명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다. 58절에서는 “생명의 방”에 관한 말과 성체성사적 선물에 관한 가르침을 연결하면서, 예수의 살과 피는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빵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재확인한다. 특히 53절은 문맥상 유다인들이 제기한 이의에 대한 강도 높은 표현이다: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셔야 한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들어높여진 천상적 사람의 아들이다. 비로 이 천상적 사람의 아들이 성체성사적 선물을 주는 신적 생명의 전달자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란 표현은 예수의 살과 피의 실재성을 강조하면서, 성체성사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지상 예수의 “육체적인 살과 피”가 아니라 천상적 사람의 아들의 “영으로 가득 찬 살과 피”임을 가리키는 데 역점이 있다. 그러나 성사적으로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신앙인은 천상적으로 현존하는 그리스도와 지상에 와서 살았던 예수가 동일함을 고백한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구원의 원천으로서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과 “육”을 취해 인간 가운데 오신 역사상 구세주를 증언한다. 이제까지 삼인칭으로 언급되던 표현이 일인칭, 곧 “내 살”,“내 피”로 언급됨으로써 예수의 자기계시가 더 강조된다. 즉,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는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곧 예수 자신의 살과 피라는 것이다. 성체성사적으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얻은 영원한 생명은 종말 부활 때 완성된다. 55절 먹고 마시는 행위보다 먹고 마시는 이 안에 지속되는 생명에 역점이 있다. 예수의 살과 피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계속 누릴 수 있게 하는 진실한 “음식”이요 “음료”라는 것이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고, 성체성사적 선물을 취한 신앙인만이 그 생명의 약속을 가지게 된다. 56절 성체성사적 선물을 취한 신앙인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일치를 이룬다는 뜻이다. 성체를 취한 신앙인에게 약속된 생명이 바로 이런 일치를 통해 성취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는 자체가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이루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일치다. 57절 “하늘의 빵”,“생명의 빵”, “하느님의 빵” 등으로 표현된 말과 상징적인 “살과 피”의 이중적 표현이 이제 “나”라는 인격적 표현 안에 통합되어 “나를 먹는다”로 언급된다. 그리하여 성사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그리스도 자신과 “살아 있는”인격적 일치를 이루기 위한 특별한 방법이라는 점도 시사된다. 아버지는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에 “살아 계시는”분이고, 아버지는 또한 아들을 파견하여 그 안에 생명을 가지도록 하셨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다”. 이렇듯이 아들고 이제 성체성사 안에서 자기를 “먹는” 신앙인, 곧 자신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에게 바로 그 생명을 주어 “자기로 말미암아”살게 한다. 58절 생명을 주는 아들을 가리킨다. 33절과 50절에 언급된 예수의 자기계시 내용과 관련시킴으로써 빵 안에서 실재로 죽음을 이겨내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성체성사적 가르침은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의 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도 시사한다. 49-50절 참조. 일부 사본에는 “조상들이 만나를 먹고도 ... ”또는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고도...” 51ㄱㄴ절 참조. 59절 예수의 생명의 빵에 관한 말과 성체성사적 가르침이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저자는 보도한다(24절 참조). 이로써 역사적 신빙성도 제시하고자 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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