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 31) 소돔의 심판(審判)이 주는 교훈 (창세19,1-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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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29 | 조회수44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31) 23. 4. 29. 토 소돔의 심판(審判)이 주는 교훈 (창세19,1-29) 1 저녁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는데, 그때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다. 롯이 그들을 보자 일어나 맞으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2 말하였다. “나리들, 부디 제 집으로 드시어 밤을 지내십시오. 발도 씻고 쉬신 뒤에,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십시오.” 그러자 그들은 “아니오. 광장에서 밤을 지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3 그러나 롯이 간절히 권하자, 그들은 롯의 집에 들기로 하고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롯이 그들에게 큰 상을 차리고 누룩 안 든 빵을 구워 주자 그들이 먹었다. 4 그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성읍의 사내들 곧 소돔의 사내들이 젊은이부터 늙은이까지 온통 사방에서 몰려와 그 집을 에워쌌다. 5 그러고서는 롯을 불러 말하였다. “오늘 밤 당신 집에 온 사람들 어디 있소? 우리한테로 데리고 나오시오. 우리가 그자들과 재미 좀 봐야겠소.” 6 롯이 문 밖으로 나가 등 뒤로 문을 닫고 7 말하였다. “형제들, 제발 나쁜 짓 하지들 마시오. 8 자,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딸이 둘 있소. 그 아이들을 당신들에게 내어 줄 터이니,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다만 내 지붕 밑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니, 이들에게는 아무 짓도 말아 주시오.” 9 그러나 그들은 “비켜라!” 하면서 “이자는 나그네살이하려고 이곳에 온 주제에 재판관 행세를 하려 하는구나. 이제 우리가 저자들보다 너를 더 고약하게 다루어야겠다.” 하고는, 그 사람 롯에게 달려들어 밀치고 문을 부수려 하였다. 10 그때에 그 두 사람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문을 닫았다. 11 그리고 그 집 문 앞에 있는 사내들을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눈이 멀게 하여, 문을 찾지 못하게 만들었다. 12 그러고 나서 그 사람들은 롯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가족들이 여기에 또 있소? 사위들과 그대의 아들딸들, 그리고 성읍에 있는 그대의 가족을 모두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시오. 13 우리는 지금 이곳을 파멸시키려 하오. 저들에 대한 원성이 주님 앞에 너무나 크기 때문이오. 주님께서 소돔을 파멸시키시려고 우리를 보내셨소.” 14 롯은 밖으로 나가 장차 자기 딸들을 데려갈 사위들에게 말하였다. “자, 이곳을 빠져나가게. 주님께서 곧 이 성읍을 파멸시키실 것이네.” 그러나 사위들은 롯이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였다. 15 동이 틀 무렵에 천사들이 롯을 재촉하며 말하였다. “자, 이 성읍에 벌이 내릴 때 함께 휩쓸리지 않으려거든, 그대의 아내와 여기에 있는 두 딸을 데리고 어서 가시오.” 16 그런데도 롯이 망설이자 그 사람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주님께서 롯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17 그들은 롯의 가족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 18 그러나 롯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리,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19 이 종이 나리 눈에 들어, 나리께서는 이제껏 저에게 하신 것처럼 큰 은혜를 베푸시어 저의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재앙에 휩싸여 죽을까 두려워, 저 산으로는 달아날 수가 없습니다. 20 보십시오, 저 성읍은 가까워 달아날 만하고 자그마한 곳입니다. 제발 그리로 달아나게 해 주십시오. 자그마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 목숨을 살릴 수 있겠습니다.” 21 그러자 그가 롯에게 말하였다. “좋소. 내가 이번에도 그대의 얼굴을 보아 그대가 말하는 저 성읍을 멸망시키지 않겠소. 22 서둘러 그곳으로 달아나시오. 그대가 그곳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내가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리하여 그 성읍을 초아르라 하였다. 23 롯이 초아르에 다다르자 해가 땅 위로 솟아올랐다. 24 그때 주님께서 당신이 계신 곳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25 그리하여 그 성읍들과 온 들판과 그 성읍의 모든 주민, 그리고 땅 위에 자란 것들을 모두 멸망시키셨다. 26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27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주님 앞에 서 있던 곳으로 가서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들판의 온 땅을 내려다보니, 마치 가마에서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29 하느님께서 그 들판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고 있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롯을 그 멸망의 한가운데에서 내보내 주셨다. 오늘 본문은 소돔의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소돔의 죄에 대해서 알고 계시지만 직접 내려가셔서 확인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두 천사가 소돔에 이릅니다. (창세19,1) 1 저녁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는데, 그때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다. 롯이 그들을 보자 일어나 맞으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여기 보면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천사를 봅니다. 고대에 성문은 주로 재판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롯은 소돔에서 재판을 할 정도로 놓은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13,12-13)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요르단 들판의 여러 성읍에서 살았다. 롯은 소돔까지 가서 천막을 쳤는데, 13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 여기서 소돔까지란 소돔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소돔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14장12절에 보면 이미 소돔의 백성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돔이 전쟁에서 패했을 때 같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제 롯은 소돔에서 다른 사람을 재판할 정도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저녁때라고 한 것은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롯이 소돔에서 남을 재판할 정도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고, 밤늦게 까지 수고 하고 있지만 오늘 밤 소돔은 곧 하느님의 불 심판을 받아서 없어질 도성이었습니다. 이사야서가 기록될 당시가 BC8세기였다고 합니다. 이때가 유다나라와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제일 크게 잘 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특히 남 왕국 유다의 경우에는 종교적으로 제일 부흥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제사에 열심이었고, 예배에 열심이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은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열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사람이 망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다가 밑바닥으로 내려가면 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제일 잘 나갈 때 그때가 위기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심지어 종교적으로 하느님께 열심이 있지만 그것이 형식적이고 가식적일 때 위기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아무리 경제적으로 잘 나가고, 또 세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도 하느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지 않으면 그 높은 자리는 멸망으로 내려가는 미끄럼틀 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내가 경제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있고, 세상으로 롯처럼 안정된 위치에 있다고 절대 안심하지 맙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롯의 문제는 단순히 그가 소돔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 아니라 롯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롯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은 롯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18장과 서로 대조하면서 보아야합니다. 18장에서 아브라함은 마무레 참나무 숲에서 하느님과 친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그네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롯은 하느님과 친교했다는 것이 없습니다. 단순히 성문에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풍습대로 2절에서 나그네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롯도 나그네를 대접합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 (창세19,3) 3 그러나 롯이 간절히 권하자, 그들은 롯의 집에 들기로 하고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롯이 그들에게 큰 상을 차리고 누룩 안 든 빵(무교병)을 구워 주자 그들이 먹었다. 앞에서 아브라함은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대접했습니다. 또 송아지를 잡아서 요리해서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롯은 무교병을 구워서 대접합니다. 무교병이란 누룩을 넣지 않은 거친 음식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롯은 손님이 왔는데, 라면 하나 끊여서 대접을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롯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그네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마태25장).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극진히 대우를 하면서 힘이 없어 보이는 약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한다면 그것이 그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굽실거립니다. 그런데 약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대합니다. 그 사람에게 하느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롯의 문제는 세상으로 성공하고 바쁜 삶이었지만, 하느님과 친교(親交)하는 삶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대접하는데, 세상방식으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그네가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4절부터 소돔의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19,4-5) 4 그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성읍의 사내들 곧 소돔의 사내들이 젊은이부터 늙은이까지 온통 사방에서 몰려와 그 집을 에워쌌다. 5 그러고서는 롯을 불러 말하였다. “오늘 밤 당신 집에 온 사람들 어디 있소? 우리한테로 데리고 나오시오. 우리가 그자들과 재미 좀 봐야겠소.” 4절에서 그들은 두 천사입니다. 여기서 “그들이”는 남성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천사들은 모두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래서 아주 잘 생기고 아름다운 남자가 롯의 집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소돔 백성들이 젊은 사람 늙은 사람 막론하고 원근에서 모여서 롯의 집을 에워쌉니다. 그리고 “오늘 밤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끌어내려 우리가 그들과 재미 좀 봐야겠소.”고 합니다. 여기서 남녀노소라고 하지 않고 노소(老小)라고 합니다. 또 노소를 모두 남성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서 “재미 좀 봐야겠소”라는 “야다”라는 말로서 성적으로 관계를 가지다는 말입니다. “야다”는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였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창세4,1). 또 8절에 롯이 딸을 주려고 하면서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딸이라고 하는데, “좋을대로” 란 성관계를 의미하는 “야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소돔의 남자들은 동성애를 하려고 천사를 부르고 있습니다. 또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를 하려고 합니다. 또 한 세대만 아니라 모든 세대 남자들이 동성애를 하려고 천사를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 천사는 소돔의 죄를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알아볼 것도 없이 직접 소돔의 죄악상을 보고 있습니다. (창세19,6-8) 6 롯이 문 밖으로 나가 등 뒤로 문을 닫고 7 말하였다. “형제들, 제발 나쁜 짓 하지들 마시오. 8 자,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딸이 둘 있소. 그 아이들을 당신들에게 내어 줄 터이니,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다만 내 지붕 밑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니, 이들에게는 아무 짓도 말아 주시오.” 이런 롯의 행동이 이해가 되십니까? 나그네를 지키기 위해서 딸을 사람들에게 준다는 말이 됩니까? 우리 정서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롯이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정말 이 두 천사들을 지키기 위해서 딸을 주겠다고 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롯의 체면을 세우기 위합니다. 중동지방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들의 체면을 세웁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잘 대접하면 그 집의 어른의 체면이 서고 위상이 높아집니다. 그러니까 롯은 동성애에 대해서는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소돔의 타락한 성문화에 빠져 있고, 잘못된 체면문화에 빠져있습니다. (창세19,10-11) 10 그때에 그 두 사람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문을 닫았다. 11 그리고 그 집 문 앞에 있는 사내들을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눈이 멀게 하여, 문을 찾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제 천사들이 손을 내 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문밖에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이기에 가능했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소돔 사람들이 영적으로 민감했다면 여기서 행동을 중단했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천사를 통해서 눈이 멀어도 계속해서 문을 찾느라고 헤매고 있습니다. (창세19,12-14) 12 그러고 나서 그 사람들은 롯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가족들이 여기에 또 있소? 사위들과 그대의 아들딸들, 그리고 성읍에 있는 그대의 가족을 모두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시오. 13 우리는 지금 이곳을 파멸시키려 하오. 저들에 대한 원성이 주님 앞에 너무나 크기 때문이오. 주님께서 소돔을 파멸시키시려고 우리를 보내셨소.” 14 롯은 밖으로 나가 장차 자기 딸들을 데려갈 사위들에게 말하였다. “자, 이곳을 빠져나가게. 주님께서 곧 이 성읍을 파멸시키실 것이네.” 그러나 사위들은 롯이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였다. 롯은 소돔이 곧 멸망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사위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사위될 사람들이 장인이 될 롯의 말을 농담으로 들은 것은 누구의 문제이겠습니까? 첫째는 롯의 문제입니다. 평상시 롯이 사위들에게 어떻게 했기에 이런 급한 상황에서 롯의 말을 농담으로 들었겠습니까? 또 사위들도 문제입니다. 누구를 통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듣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아마 이들은 롯의 위치로 보아 소돔에서 유력한 집안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아무리 높은 집안이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듣는 사람은 결국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19,15-16) 15 동이 틀 무렵에 천사들이 롯을 재촉하며 말하였다. “자, 이 성읍에 벌이 내릴 때 함께 휩쓸리지 않으려거든, 그대의 아내와 여기에 있는 두 딸을 데리고 어서 가시오.” 16 그런데도 롯이 망설이자 그 사람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주님께서 롯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17절에서 천사는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러니 롯은 산에까지 갈 수 없으니 다른 작은 성읍에 머물게 해 달라고 합니다(18-20). 천사가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22절에서 롯이 그 작은 성읍에 가기까지 천사는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십니다(24).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됩니다(26). (창세19,29) 29 하느님께서 그 들판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고 있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롯을 그 멸망의 한가운데에서 내보내 주셨다. 우리가 생각할 때 창세기 18장에서의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실패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생각하시어 롯을 멸망 중에서 구원하셨습니다. (2베드2,6) 6 “소돔과 고모라 두 고을은 멸망하도록 단죄하시고 잿더미로 만드시어, 불경한 자들에게 내릴 벌의 본보기로 세우셨습니다.” 라고 합니다. 소돔의 심판은 과거에 역사가운데 한 번만 일어났던 사건이 아닙니다. 소돔의 심판은 언제든지 일어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돔의 심판은 오늘도 우리에게 불경한 자들에게 심판의 본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서 롯처럼 높은 자리에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재물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롯처럼 우리가 쌓아놓았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다 불타서 없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래도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그러면 롯이 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많은 것을 얻었지만 모든 것이 불타고 부끄러운 구원만 받았습니까? 그 이유가 창세기13장 10절에 있습니다. (창세13:10) 10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들판을 바라보니, 초아르에 이르기까지 어디나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다. 그때는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롯은 눈을 들어 요르단 지역을 보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옆에 있던 소알 지역까지 그곳은 물이 넉넉함으로 에덴동산과 같았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풍요로웠던 소돔이지만 성경은 ~ (창세13:13) 13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 사실 이미 소돔사람들이 야훼하느님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이것을 알고도 당장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는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어느 때까지는 계속해서 올라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한순간에 불타서 없어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 (창세13:17-18) 17 자, 일어나서 이 땅을 세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고 가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여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 18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만일 롯이었다면 열심히 땅 밟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평이라도 더 많은 땅을 자치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든 걱정은 다 내려놓고 하느님과 더 친밀한 교제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어떤 아들이 지방에서 서울로 직장을 정했다고 합니다. 그때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와서 아들에게 다짐을 시킨 것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는 네가 어떻게 돈을 벌고 일하는 것은 잘 모르겠다. 엄마가 네게 당부하는 것은 아무리 바빠도 주일미사는 빠지지 마라 그리고 모임에도 빠지지 마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 아들이 하느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니까 회사에서 정말 성실한 직원이라고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실하게 일하고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최고의 실적을 거두는 사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합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또한 인생은 해석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다 같이 애굽을 경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해서 아내를 잃어버릴 뻔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도리어 파라오를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손에서 구출해주시고,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산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은 “내가 물질을 쫓아갔더니 믿지 않는 사람 파라오에게 책망을 듣는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내가 아무리 물질을 얻었지만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절대 물질 중심으로 살지 말고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야겠다”는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물질의 궁핍 때문에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던 아브라함은 이제 더 이상 물질을 먼저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롯에게 너는 좌(左)하면 나는 우(右)하고 너는 오른쪽하면 나는 왼쪽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 모든 땅을 네게 주겠다고 해도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친교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같이 애굽의 사건을 경험하고 롯은 ~ “내가 보니 정말 애굽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풍요로운 땅이구나, 아마 에덴동산도 이와 같았을 것이야. 또 하느님은 아브람이 거짓말을 해도 파라오를 책망하시네, 그리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더 많은 재산을 주시네, 그렇구나 나도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서라도 돈만 많이 벌면 되겠구나.”라고 해석했습니다. 그 해석의 결과 롯은 소돔은 선택했습니다. 인생은 단순히 열심히 사는 것도, 내가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서 성취를 해도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불타서 없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인간적으로만 해석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그래서 롯처럼 당장 눈에 보기에 좋은 소돔을 선택을 하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과 친교(親交)하는 헤브론을 선택합시다. 그래서 내가 수고한 모든 것들이 불타서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상급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2)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살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의 사위가 될 사람들은 롯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농담(弄談)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돔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동성애입니다. 동성애를 가담하거나 방관하거나 묵인하면 소돔고모라와 같이 하느님의 불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롯의 사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동성에 대해서 계속 연구하면서 느낀 것은 동성애의 문제는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또 단순히 소수의 인권에 대한 문제도 아닙니다. 또 차별의 문제도 아닙니다. 동성애의 문제는 동성애는 죄라고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왜 우리가 동성애가 죄라고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소돔고모라가 심판받는 말씀을 하시는 그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으면 이와 같이 멸망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사도바오로가 테살로니카 교회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1테살2,13)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건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됩시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음으로 날마다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성도(聖徒) 됩시다. 3)소돔을 떠나야 인생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19,23) 23 “롯이 초아르에 다다르자 해가 땅 위로 솟아올랐다.” 물론 여기서 해가 솟는 것은 실제 해가 돋은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저자는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인생에 있어서 희망이 있고 없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18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친교하고 있을 때 해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이것도 실제 해가 떠 오른 것도 있지만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친교하고 있을 때 그의 인생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본문 1절에서는 저녁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실제 저녁이라는 말도 되지만 롯이 성문에 앉아서 재판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지만 그의 인생이 어두움을 향해서 달려 있는 저녁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롯이 소돔을 떠나 소알로 들어갈 때 실제 해도 돋은 것도 있지만 비로소 롯의 인생에 희망의 빛이 떠오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롯과 우리에게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 소돔을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롯은 자꾸만 지체합니다. (창세19,16) 16 그런데도 롯이 망설이자 그 사람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소돔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주님께서 롯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소돔을 떠나기를 지체하는 롯의 손을 강제로 잡아서 소돔을 떠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롯을 향하신 하느님의 자비(慈悲)와 사랑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떠날 소돔은 어떤 것입니까? (에제16,49-50) 49 네 동생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다. 소돔과 그 딸들은 교만을 부리며, 풍부한 양식을 가지고 걱정 없이 안락하게 살면서도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손을 거들어 주지 않았다. 50 그들은 거만을 떨며 내 눈앞에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나는 네가 본 것처럼 그들을 없애 버렸다. 먼저 소돔의 죄는 교만(驕慢)입니다. 교만은 내가 하느님의 위치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또 나를 하느님보다 더 경배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교만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사야 1장에서는 소돔의 죄는 성전마당만 밟고 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나와서 열심을 다해서 이 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않으면 성당마당만 밟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성당마당만 밟는 신앙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교만에서 떠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성당마당만 밟는 신앙에서 떠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롯을 잡아서 소돔을 나오게 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손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느님의 사랑의 손을 붙잡고 교만의 소돔에서 날마다 나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또 하느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의 손을 붙잡고 성당 마당만 밟는 신앙에서, 날마다 소돔에서 나와 희망의 빛을 향해서 달려갑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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