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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32) 실수(失手)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은혜(恩惠) (창세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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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30 조회수292 추천수2 반대(0) 신고

 

창세기(32) 23. 4. 30.

 

실수(失手)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은혜(恩惠)

 

(창세20,1-18)

1 아브라함은 그곳을 떠나 네겝 땅으로 옮겨 가서, 카데스와 수르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라르에서 나그네살이하게 되었을 때, 2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라르 임금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다.

3 그날 밤 꿈에, 하느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네가 데려온 여자 때문에 너는 죽을 것이다. 그 여자는 임자가 있는 몸이다.” 4 아비멜렉은 아직 그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당신께서는 죄 없는 백성도 죽이십니까? 5 아브라함 자신이 저에게 이 여자는 제 누이입니다.’ 하였고, 그 여자 또한 스스로 그는 제 오라비입니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흠 없는 마음과 결백한 손으로 이 일을 하였습니다.”

6 그러자 하느님께서 꿈에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네가 흠 없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한 줄 안다. 네가 나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준 이가 바로 나다. 네가 그 여자를 건드리는 것을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 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 사람은 예언자이니,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면 너는 살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일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너에게 딸린 자들이 모두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알아 두어라.” 8 아비멜렉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 종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서, 그들에게 이 일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9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어째서 이런 짓을 하였소? 내가 그대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대는 나와 내 왕국에 이렇게 큰 죄를 끌어들였소? 그대는 해서는 안 될 일을 나에게 저질렀소.” 10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물었다. “그대는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질렀소?” 11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곳에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이라고는 도무지 없어서, 사람들이 내 아내 때문에 나를 죽일 것이다.’ 하고 내가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12 더구나 그 여자는 정말 나의 누이입니다.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달라서 내 아내가 되었습니다. 13 하느님께서 내게 아버지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하셨을 때, 나는 그 여자에게 말하기를, ‘당신에게 당부하는데,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내가 당신의 오라비라고 말하시오.’ 하였습니다.”

14 그러자 아비멜렉은 양과 소, 남종과 여종들을 데려다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돌려주었다. 15 그러고 나서 아비멜렉이 말하였다. “보시오, 내 땅이 그대 앞에 펼쳐져 있으니 그대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으시오.” 16 그리고 사라에게 말하였다. “나는 그대의 오라버니에게 은전 천 닢을 주었소. 보시오, 그것은 그대와 함께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그대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이오. 이로써 그대는 모든 면에서 결백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소.”

17 이에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기도하자,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의 병을 고쳐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되었다. 18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때문에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태를 닫아 버리셨던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성장해 왔는가를 보았습니다. 처음에 아브라함의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이며 무조건 이 세상에서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에게 책망을 듣고 애굽에서 나오는 경험을 통해서 이제는 물질중심이 아니라 하느님중심으로 사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롯을 구하기 위한 전쟁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자신들만의 주님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왕이 되시고 주님이 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뜻에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에서 아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은 잘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13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99세 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내가 너와 사라를 통해 아들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본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90점까지 올라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22장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는데, 그때 비로소 100점이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창12장부터 오늘 본문까지의 말씀을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장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장하다가 아브라함의 믿음이 다시 창12장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20,1) 1 아브라함은 그곳(헤브론)을 떠나 네겝 땅으로 옮겨 가서, 카데스와 수르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라르에서 나그네살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참나무 숲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하느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헤브론을 떠나서 다시 네겝 땅을 옮깁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기근이 들어서 가나안 남쪽 네겝으로 옮겨간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남쪽인 네겝은 사막지역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에서는 아브라함이 네겝으로 갔다가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은 애굽으로는 가지 않지만 카데스와 수르 사이 그라르에 거주합니다. 여기서 왜 아브라함이 헤브론을 떠나는가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때문에 가나안 지역에 어떤 환경적인 위기가 오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환경이 어려우면 가축을 기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가족들의 생계가 어렵고 막막합니다. 이것은 오늘로 말하면 코로나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서 가족들이 저 먼 지방에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내려간 그라르는 블레셋 사람의 땅입니다.

 

(창세20,2) 그라르에서 나그네살이하게 되었을 때, 2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라르 임금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다.

 

아브라함은 여기서도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가 11절에 있습니다. “11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곳에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이라고는 도무지 없어서, 사람들이 내 아내 때문에 나를 죽일 것이다.’ 하고 내가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에서와 같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는 사라의 아름다움 때문에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라의 나이는 89세나 혹은 90세입니다. 사라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90살 된 사라 때문에 아브라함이 죽음을 걱정했겠습니까? 학자들은 사라의 아름다움이 단순히 겉으로 보는 아름다움도 있지만, 여성으로서 기품이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되었건 아브라함이 염려했던 대로 정말 그라르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리고 갑니다. 아비멜렉은 블레셋 왕의 호칭입니다. 애굽 왕은 모두 파라오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왕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는 뜻에서 모두 아비멜렉입니다.

 

(창세20,3) 3 그날 밤 꿈에, 하느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네가 데려온 여자 때문에 너는 죽을 것이다. 그 여자는 임자가 있는 몸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말씀으로만 한 것이 아닙니다. “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때문에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태를 닫아 버리셨던 것이다.”고 합니다.

 

(창세20,4) 4 아비멜렉은 아직 그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당신께서는 죄 없는 백성도 죽이십니까?

 

아비멜렉은 사라를 데리고 왔어도 사라와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사라가 남편이 있는 여인인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보았을 때 정말 억울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공의에 호소입니다. “하느님은 의로운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 같이 아무 죄도 없는 의로운 백성도 이렇게 죽이려고 하십니까?” 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아비멜렉이 말합니다.

 

(창세20,5-6) 5 아브라함 자신이 저에게 이 여자는 제 누이입니다.’ 하였고, 그 여자 또한 스스로 그는 제 오라비입니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흠 없는 마음과 결백한 손으로 이 일을 하였습니다.” 6 그러자 하느님께서 꿈에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네가 흠 없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한 줄 안다. 네가 나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준 이가 바로 나다. 네가 그 여자를 건드리는 것을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이 잘못이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사라가 남편이 있는 여인임을 알게 함으로 하느님 앞에서 범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에 대해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창세20,7) 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 사람은 예언자이니,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면 너는 살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일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너에게 딸린 자들이 모두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알아 두어라.”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의 아내를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비록 실수는 하였지만 그는 예언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면 네가 살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네가 만일 사라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라 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두 번씩이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에 오늘 본문과 같은 아브라함의 잘못을 기록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절대 그 어떤 사람이라도 인간을 영웅시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구약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을 한 사람 뽑는다면 다윗을 뽑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다윗이 말년에 인구조사를 하다가 하느님께 큰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인간이란 정말 별수 없다는 것과 또 믿음이 성숙된 인간이라도 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별수 없는 인간인 아브라함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실수하는 별수 없는 인간임을 고백해야합니다.

또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반복되는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감을 느낍니다. 자괴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원래 나는 이런 인간이야 라고 하면서 자포하기 하면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가능하면 실수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수를 하지 않으려 하지만 실수하고 또 실수합니다.

우리가 잘나갈 때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실수할 때도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수하였을 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실수하여 넘어졌을 때 또 일어서도 또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실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 아브라함의 반복된 실수를 통해서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창세기 20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소돔의 심판에 대해서 하느님과 대화를 할 정도로 대단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100세 때 자녀를 낳는 대단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소돔이 심판을 받을 때 먼 곳에 지켜보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누구보다 더 의로운 의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외아들(獨子) 이사악을 바치는 것을 보면서 정말 아브라함은 우리가 근접하기 어려운 저 하늘 위에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지금까지 온 아브라함의 모든 생애는 오직 하느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모든 일들도 다 하느님의 은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偶像)을 섬기던 집안에 있던 아브라함을 아무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부르신 하느님의 은혜였습니다. 애굽에서 아브라함을 왜 건져주십니까? 그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였습니다.

롯을 구하기 위한 전쟁에서 지금 푸틴과 같은 크도를라오메르 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습니까? 그것도 그의 방패가 되시고, 그를 대신하여 싸워주신 하느님의 은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까? 이것도 그를 믿게 하신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제일 크게 오해하는 것은 믿음이란 내가 내 의지로 하느님을 믿어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에페소서에 보면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2,8)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 인간의 결단이 아닙니다. 또 믿음은 우리의 의지도 아닙니다. 또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믿어준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은 믿은 것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다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또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을 보았을 때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였다고 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51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난 다음 나단이 그에게 와서 그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난 후 쓴 시편입니다. 다윗은 시51편을 쓰기 전까지 자신이 왕이 되고, 자신의 나라가 평안하게 된 것이 자신의 의로움 때문이었고, 또 제사의 열심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단이 와서 깨닫게 된 것이 그는 누구보다 더 큰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난 다음 다윗이 생각하게 된 것이 내가 왕이 되고, 내가 다스리는 나라가 평안하게 된 것은 결코 나의 의로움이나 제사(祭祀)의 열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닫고 난 다음 다윗이 시편에서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 비록 내가 죄인이지만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승리하였던 비결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慈悲) 때문입니다.

다윗 뒤에 모든 왕들이 다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유일한 관심과 목적은 오직 나라의 안정과 번영이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왕들이 잘 몰랐던 것은 나라의 안정과 번영이 단순히 무력의 힘이니 인간적인 힘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깨닫게 된 것은 하느님이 다스리는 하느님나라는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안정이 되고 번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제일 중요하게 한 일은 다윗은 밤마다 하느님 앞에 울면서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림과 같이하느님의 은혜만 기다렸습니다. 그가 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 앞에 우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항상 하느님 앞에서 눈물 젖은 가슴으로 살았습니다. 그때마다 하느님께서 그를 대신해서 나라에 모든 대적을 다 물리쳐주심으로 평안을 주시고 안식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느님 앞에서 오직 하느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에 참 안식과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 밤새 울기만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디 하느님께서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해주시는 것을 날마다 경험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도 이런 하느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도 제일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 하느님의 은혜가 있어야합니다. 은혜로 되는 것이지 인간적인 계산으로 잘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다윗도, 아브라함 다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바오로처럼 육체의 가시들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낙심하지 말며,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지는 자리에서도 하느님의 은혜로 또 일어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아브라함의 실수를 통해서 우리가 어느 한 순간이라도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20,11) 1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곳에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이라고는 도무지 없어서, 사람들이 내 아내 때문에 나를 죽일 것이다.’ 하고 내가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서 항상 하느님과 친교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라르 땅에 오니까 그 곳 사람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니까 그곳에는 하느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라르에서 그를 지켜주시는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누이로 속였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도 한 순간이라도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언제든지 실수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바다 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한 순간에 풍랑(風浪)이는 바다를 바라볼 때 그는 물속에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알의 무리를 물리쳤던 엘리야가 한 순간에 이세벨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하느님 앞에서 죽여 달라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한 순간도 끊임없이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사야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은 사람을 바라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어떤 힘이 있는 강대국도 바라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 자신도 바라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라는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하느님만을 바라보므로 날마다 일어설 수 있어야겠습니다.

 

셋째, 하느님은 우리에게 실수해도 너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20,7) 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 사람은 예언자이니,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면 너는 살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일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너에게 딸린 자들이 모두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알아 두어라.”

 

우리는 얘언자라 하면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언자나비라는 말로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내 가슴에 품고 하느님께 중보 기도하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실수한 것이 맞다. 그리고 네가 옳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네가 아브라함에게 함부로 대하면 절대 안 돼, 아브라함은 비록 실수했어도 그는 예언자야. 그는 중보기도자야. 그가 너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 그러니 사라를 빨리 돌려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학생들이 학교에 다닐 때 월사금이라는 것을 냈습니다. 그런데 장애를 가진 공무원의 자녀가 월사금을 제때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고 합니다. 그 선생님이 장애를 가진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아주 모욕적인 이야기를 그 아이에게 했다고 합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학교에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제 때 월사금 내지 못한 것은 잘못입니다. 여기 월사금이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 우리 아이에게 함부로 말하지 하지 마세요, 그 아이는 내 아이에요라고 하면서 그 아이를 다른 학교에 전학시켰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 그들이 하는 말이 모두 맞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보다 더 좋은 삶을 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아무리 내 자녀를 비난해도 그래도 그들은 내 자녀야라고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실제 바벨론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사41,14) 14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벌레 같은 너 야곱아라고 하고 있습니다. 옛날 성경에서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 합니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이 이스라엘백성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또 이스라엘백성들이 자기 자신을 두고 한 말입니다.

실제 이스라엘백성들을 바벨론포로고 잡혀가서 짖밟히고 뭉개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벌레 같았고, 밟아도 꿈틀거리기만 하는 지렁이와 같았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백성들도 자기 자신을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백성의 조롱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41,8) 8 그러나 너 이스라엘, 나의 종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를 비난하고 무시해도 그러나 너희는 나의 종,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너희가 이 세상에서 실수하고 실패한 삶을 살았어도 그러나 너희는 내 것이야 라고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 이스라엘에 너는 내가 만세 전부터 사랑하여 선택한 내 자녀야 라고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는 아브라함과 같이 이 세상의 심판에 대해서 의논하는 내 벗이야 내 친구야 라고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너는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내 자녀야라고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볼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 정도로 내가 사랑하는 내 자녀야. 비록 거슬렸어도 너는 존귀한 내 자녀야.” 라고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너는 이 세상을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중보기도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실수했어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중보기도자로 살아갑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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