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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영근 신부님의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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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30 조회수413 추천수1 반대(0) 신고

230430. 부활 제4주일.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오늘은 부활 4 주일이며, ‘성소 주일’입니다.
 
<제1독서>는 오순절에 베드로가 사도 베드로가 했던 설교의 결론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요 “메시아”로 삼으신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그리고 그는 <제2독서>인 그의 편지에서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베드 2,2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도둑의 비유”를 통해,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문’은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곧 ‘문’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문”은 “드나드는 문”으로 하나의 문이지만 두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방향은 밖에서 “양 우리”로, 다른 한 방향은 “양 우리” 안에서 밖으로 향합니다.
 
이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수평적 이동의 통로로서의 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이동의 통로서의 문이기도 합니다. 곧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그러니 ‘생명과 구원의 문’을 나타내줍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으로서 그 문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고 말하며, 크리소스토무스는 성경이 문이라고 해석하며, ‘말씀의 문’을 통해 생명이 드나듦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는 그 드나듦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동행하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라 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은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문’은 오히려,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이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에게 귀 기울이지도 않고 목자를 따르지도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울타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단된 울타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열려진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세상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과 구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요 먹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우리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문’을 드나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9)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당신 풀밭에서 생명의 풀을 뜯게 하소서.
당신 기쁨이 차오르고 당신 사랑에 깃들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당신의 집에 저의 거처를 마련해주소서. 아멘.
 
230430. 부활 제4주일.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오늘은 부활 4 주일이며, ‘성소 주일’입니다.
 
<제1독서>는 오순절에 베드로가 사도 베드로가 했던 설교의 결론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요 “메시아”로 삼으신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그리고 그는 <제2독서>인 그의 편지에서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베드 2,2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도둑의 비유”를 통해,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문’은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곧 ‘문’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문”은 “드나드는 문”으로 하나의 문이지만 두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방향은 밖에서 “양 우리”로, 다른 한 방향은 “양 우리” 안에서 밖으로 향합니다.
 
이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수평적 이동의 통로로서의 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이동의 통로서의 문이기도 합니다. 곧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그러니 ‘생명과 구원의 문’을 나타내줍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으로서 그 문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고 말하며, 크리소스토무스는 성경이 문이라고 해석하며, ‘말씀의 문’을 통해 생명이 드나듦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는 그 드나듦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동행하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라 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은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문’은 오히려,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이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에게 귀 기울이지도 않고 목자를 따르지도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울타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단된 울타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열려진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세상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과 구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요 먹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우리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문’을 드나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9)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당신 풀밭에서 생명의 풀을 뜯게 하소서.
당신 기쁨이 차오르고 당신 사랑에 깃들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당신의 집에 저의 거처를 마련해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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