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33) 웃게 하시는 하느님 (창세21,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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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30 | 조회수33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33) 23. 5. 1. 월 웃게 하시는 하느님 (창세21,1-7) 1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해 주시니, 2 사라가 임신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러 주신 바로 그때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3 아브라함은 사라가 자기에게 낳아 준 아들의 이름을 이사악이라 하였다. 4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자기 아들 이사악이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베풀었다. 5 아브라함에게서 아들 이사악이 태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백 살이었다. 6 사라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나한테 기쁘게 웃어 주겠지.” 7 그리고 또 말하였다. “사라가 자식들에게 젖을 먹이리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감히 말할 수 있었으랴? 그렇지만 내가 늙은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 않았는가!” 오늘 본문 6절에서 “사라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나한테 기쁘게 웃어 주겠지.” 사라는 25년을 아들을 기다렸다가 낳았기 때문입니다. 이 전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 엘리에젤을 아들로 하면 안 되겠냐고 하느님께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너의 진정한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라는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13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와 사라를 통해서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말을 합니까? (창세17,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이 백 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아흔 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웃음은 “이츠학”이라는 말로서 피식 웃는 말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사라도 속으로 피식 웃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사라는 이제 피식 웃는 웃음이 아닙니다. 정말 너무 기뻐서 웃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웃게 하신 분이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혼자 기뻐하지 아니하고 나와 함께 우리 모두 웃자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고 있는 하느님은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비웃음조차도 진정한 웃음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 모두를 웃게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예레29,11) 11 나는 너희를 위하여 몸소 마련한 계획을 분명히 알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평화를 위한 계획이지 재앙을 위한 계획이 아니므로, 나는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고자 한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생각은 평안(平安)입니다. 재앙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도 기쁨입니다. 에덴동산의 뜻이 기쁨의 동산입니다. (로마14,17) 17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시편16,11) 11 “당신께서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면전에서 넘치는 기쁨을,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을 누리리이다.“ 라고 합니다. 주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여기서 충만한 기쁨이란 흘러넘치는 기쁨입니다. 또 주님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영원한 즐거움이란 끊어지지 않는 기쁨입니다. 이 세상의 기쁨은 절대 영원한 기쁨이 아닙니다. 순간적으로는 기쁘지만 그 기쁨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있는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요한15,11-12)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시편30,12) 12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의 자루 옷 푸시어 저를 기쁨으로 띠 두르셨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고행(苦行)의 종교가 아니라 기쁨의 종교입니다. 또 그리스도교는 엄숙함의 종교가 아니라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표징은 기쁨이 떨어진 잔치 집에서 기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정말 웃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왔을 때는 하느님으로 인하여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①첫째,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느님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창세21,1) 1 주님(야훼)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해 주시니, 여기서 성경의 저자는 그냥 하느님께서 사라를 돌보셨고, 사라에게 해 주셨다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야훼께서 ‘말씀하신대로’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창세21,2) 2 사라가 임신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러 주신 바로 그때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또 3절에서도 아브라함이 아들의 이름을 아사악 이라고 한 것도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입니다. (창세21,3-4) 3 아브라함은 사라가 자기에게 낳아 준 아들의 이름을 이사악이라 하였다. 4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자기 아들 이사악이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베풀었다. 하느님께서 명령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이사악에게 할례(割禮)를 행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저자는 사라가 웃은 것은 단순히 아들이 태어난 웃음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웃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모세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에 주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과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너희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반드시 너희에게 웃음을 주신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처음 이 세상을 창조할 때도 이와 같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계속해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되니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그 하느님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하느님과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웃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에게도 너희가 모세가 네게 명령한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면 형통하여 웃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큰 웃음과 기쁨을 주기 전에 먼저 말씀을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차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12,2에 큰 민족을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창세기15,5에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녀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창세기17장16절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어 사라가 여러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창세기18,14. 하느님께서 1년 뒤에 사라에게 찾아오셔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주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이사악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기도의 응답이라고 보기 바랍니다. 누구에게는 이 이사악이 사라의 경우와 같이 가정의 자녀일 수 있고, 결혼할 배우자일 수 있으며 또 경제적인 회복일 수도 있고 또 이 땅에 하느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구에게는 이 이사악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느님의 사랑이 실현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라처럼 ‘하느님 제게 자녀를 주소서’ 라고 기도하고 “저에게도 내게 맞는 배우자를 주소서” 또 “하느님 저에게 경제적인 회복을 주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주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주십니다. 만일 사라가 25년 전에 가나안땅을 갔을 때 먼저 기도의 응답인 이사악을 먼저 주셨다면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이렇게 크게 웃을 수 있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웃음을 주시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으로 웃음을 주시기 전에 말씀을 주실 때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으로 당장 큰 기쁨과 웃음이 없더라도 하느님의 말씀만으로 즐거워하고 기뻐야합니다. 하박국은 하느님의 공의를 이루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도 하느님께서는 기도의 응답보다 먼저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바2,2-3) “2 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환시를 기록하여라. 누구나 막힘없이 읽어 갈 수 있도록 판에다 분명하게 써라.” 3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최소한 3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절대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이 이루어지 않아도 하느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떻게 말합니까?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예레15,16)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고난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 가운데서 단 한번이라도 기도의 응답을 받아본 것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하느님의 말씀만 붙들고 삽시다. 고통의 시간을 말씀으로 채워서 고통의 시간을 말씀만으로 즐거워하시고 기뻐한다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우리 삶 가운데 웃음을 주실 것입니다. ②둘째, 하느님의 때가 되어야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느님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창세21,2) 2 사라가 임신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러 주신 바로 그때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당장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신 시기(時機) 즉 때가 되어야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이라도 ‘때가 차야’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때가 차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시간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예(豫)를 들어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말씀하실 때 처음부터 100살이라고 하는 그 시간을 정해 놓으셨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란 어떤 시간표가 아닙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지 않고 하느님을 믿음으로 더 기다렸다면 이사악을 주시는 시간이 더 빨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때가 차야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는 아직 믿음이 성숙되지 않았는데, 너무 빨리 성공한 경우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성숙하지 않았는데, 누리는 성공은 나중에 더 큰 독(毒)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가서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고 말씀하시고 바로 외아들 이사악을 주셨다면 아브라함은 이사악에게 성숙한 믿음의 본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25년이 지나서 말씀대로 이삭을 주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 성숙시키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녀를 낳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종 엘리에젤을 자녀로 삼으려 했습니다. 또 사라도 하갈을 통해서 자녀를 낳으려 했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못할 일이 없다” 창세기를 보면 100세 때 아브라함과 90살 때 사라의 믿음이 그렇게 좋지 않게 보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로마4,19-22) 19 백 살가량이 되어,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사라의 모태도 죽은 것이라 여기면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또 사라에 대해서도 (히브11,11)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고 합니다. 믿음은 인간적인 자신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모두 인간적인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피식 웃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졌던 믿음은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하느님은 이루실 줄’을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말씀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더 완전히 성숙될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더 온전하다고 하실 때 하느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에게 웃음을 주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셋째, ③벼랑 끝에 서야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느님을 체험(體驗)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느님께서 사라를 웃게 하신 때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완전히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그 어떤 인간적인 희망이나 가능성이 없을 때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사라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인간이 완전히 절망(切望)할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질 여지가 있으면 하느님은 더 기다리십니다.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사라는 처음부터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라는 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때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아니면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랑(風浪)이는 바다에서 고생하시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밤 사경이 될 때까지를 기다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라가 지금 이 순간까지 절망의 시간을 보내며 큰 절망을 느꼈기 때에 기뻐합니다. 그래서 지금 내 상황이 가장 어두울 때라면 그때가 도리어 하느님께서 찾아오셔서 역사하실 때라는 사실입니다. (이사41,8-9) 8 “너 이스라엘, 나의 종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9 내가 너를 땅 끝에서 데려오고 그 가장자리에서 불러와 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너를 내치지 않았다.” 여기서 땅 끝과 땅 가장자리는 인생의 벼랑 끝이요 한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아무도 찾아가 붙들지 않는 상황입니다. 또 아무도 찾아가서 말하지 않는 절망적 상황을 말합니다. 정말 외롭고 고독한 상황을 말합니다. 이때 하느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아무도 너를 붙들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내가 너를 붙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아무도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나는 너에게 말을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사랑하여 택하였다, 비록 네가 절망적인 상황가운데 있지만 나는 너를 싫어하여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아무도 너를 붙들어주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너를 굳게 붙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아무도 너에게 말을 걸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만 너에게 말하여 주리라 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모든 사람들이 너를 싫어하여 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 세상이 너무 비정해서 부모를 버리는 자식이 있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녀를 버리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절대 떠나지 아니하며, 잊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또 하느님은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41,10) 10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 사탄은 우리에게 낙심을 줍니다. 좌절을 줍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영적으로 일어서지 못하고 넘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협하는 사탄, 우리를 낙심시키고 좌절시키고 넘어지게 하고 죽게 만드는 사탄의 모든 권세들을 하느님께서 반드시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놀라지 맙시다. 하느님이 우리 하느님이 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굳세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의롭고 강한 오른손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려워말고,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살아갑시다. 또 하느님께서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61,3) 3 “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정의의 참나무’ ‘당신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라 부르도록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30,5-6) 5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 거룩하신 그 이름을 찬송하여라. 6 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 가니 저녁에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환호하게 되리라. 우리의 삶에 절망의 밤이 깊은 만큼 하느님께서 반드시 더 큰 기쁨과 웃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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