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36) 결혼(結婚)이란 무엇인가 (창세24,1-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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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5-04 | 조회수33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36) 23. 5. 4. 목. 결혼(結婚)이란 무엇인가 (창세24,1-27) 1 아브라함은 이제 늙고 나이가 무척 많았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 2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아보는, 집안의 가장 늙은 종에게 말하였다. “네 손을 내 샅에 넣어라. 3 나는 네가 하늘의 하느님이시며 땅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겠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가나안족의 딸들 가운데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지 않고, 4 내 고향, 내 친족에게 가서 내 아들 이사악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하여라.” 5 그 종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그 여자가 저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드님을 나리께서 떠나오신 그 땅으로 데려가야 합니까?” 6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너는 내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7 하늘의 하느님이신 주님, 곧 나를 아버지의 집과 내 본고장에서 데려오시고, ‘내가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맹세하신 그분께서 당신 천사를 네 앞에 보내시어, 네가 그곳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올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다. 8 그 여자가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너는 나에게 한 맹세에서 풀리게 된다. 다만 내 아들만은 그곳으로 데려가서는 안 된다.” 9 그래서 그 종은 자기 주인 아브라함의 샅에 제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다. 10 그 종은 주인의 낙타 떼에서 열 마리를 데리고, 또 주인의 온갖 선물을 가지고 나호르가 사는 성읍인 아람 나하라임으로 길을 떠났다. 11 그는 여자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시간인 저녁때에, 성 밖 우물 곁에 낙타들을 쉬게 하였다. 12 그러고 나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제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 오늘 일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 제 주인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13 이제 제가 샘물 곁에 서 있으면, 성읍 주민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것입니다. 14 제가 ‘그대의 물동이를 기울여서, 내가 물을 마시게 해 주오.’ 하고 청할 때, ‘드십시오. 낙타들에게도 제가 물을 먹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 소녀가, 당신께서 당신의 종 이사악을 위하여 정하신 여자이게 해 주십시오. 그것으로 당신께서 제 주인에게 자애를 베푸신 줄 알겠습니다.” 15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브라함의 아우 나호르의 아내인 밀카의 아들 브투엘에게서 태어난 레베카가 어깨에 물동이를 메고 나왔다. 16 이 소녀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아주 예쁜 처녀였다. 그가 샘으로 내려가서 물동이를 채워 올라오자, 17 그 종이 그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그대의 물동이에서 물을 좀 들이키게 해 주오.” 18 그러자 그가 “나리, 드십시오.” 하면서, 급히 물동이를 내려 손에 받쳐 들고서는 그 종에게 물을 마시게 해 주었다. 19 이렇게 그 종에게 물을 마시게 해 준 다음, 레베카는 “낙타들도 물을 다 마실 때까지 계속 길어다 주겠습니다.” 하면서, 20 서둘러 물동이에 남아 있는 물을 물통에 붓고는, 다시 물을 길으러 우물로 달려갔다. 이렇게 레베카는 그 낙타들에게 모두 물을 길어다 주었다. 21 그러는 동안 그 남자는 주님께서 자기 여행의 목적을 이루어 주시려는지 알아보려고, 그 처녀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22 낙타들이 물을 다 마시고 나자, 그 남자는 무게가 반 세켈 나가는 금 코걸이 하나를 그 처녀의 코에 걸어 주고, 무게가 금 열 세켈 나가는 팔찌 두 개를 팔에 끼워 주고는 23 말하였다. “그대가 누구의 따님인지 나에게 말해 주오. 그대의 아버지 집에 우리가 밤을 지낼 수 있는 자리가 있겠소?” 24 레베카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밀카가 나호르에게 낳아 준 아들 브투엘의 딸입니다.” 25 그리고 그에게 또 말하였다. “저희 집에는 꼴과 여물도 넉넉하고, 밤을 지낼 수 있는 자리도 있습니다.” 26 그는 무릎을 꿇어 주님께 경배하고 나서 27 말하였다. “나의 주인에게 당신 자애와 신의를 거절하지 않으셨으니,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주님께서는 이 몸을 내 주인의 아우 집에 이르는 길로 이끌어 주셨구나.”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말년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아가 140세입니다. 창세기 2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습니다. (창세24,1) 1 아브라함은 이제 늙고 나이가 무척 많았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많아 늙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나이가 많아 늙었지만 하느님께서 모든 일(凡事)에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인생은 시작도 중요하고, 중간도 중요하지만 끝이 제일 중요합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나옵니다. 그는 당시에 판관이자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엘리는 당시에 정치적인 모든 권세도 가지고 있고 종교적인 권세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그의 나이가 많았습니다. 장수(長壽)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평생 아무 일이 없이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엘리는 끝이 좋지 않으니까 그의 모든 생애가 좋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욥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이 어떠합니까? (욥기42,12) 12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시어, 그는 양 만사천 마리와 낙타 육천 마리, 겨릿소 천 마리와 암나귀 천 마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욥은 평생 고난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하느님께서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욥의 생애는 말년이 좋으므로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다 좋았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우리 인생의 말년에 하느님께서 모든 일(凡事)에 복을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모든 일에 그에게 복을 주셨는지, 이사악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종을 고향에 보내어 이사악의 신부감을 데리고 와서 결혼시키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창세기에서 제일 긴 본문이 바로 오늘 본문인 창세기 24장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아들을 결혼시키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 생애에 있어서 결혼문제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결혼에 대해서 어릴 때 들었던 것 중에서 제일 기억이 나는 것은 “바다에 나가기 전에는 한 번 기도하고, 전쟁에 나가기 전에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하기 전에는 세 번 기도하라”입니다. 옛날에는 바다에 나가는 것은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래서 바다에 나가기 전에는 한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쟁에 나가는 것은 더한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가기 전에는 두 번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위해서는 세 번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 만큼 우리 인생에 있어서 결혼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생애는 아내 사라가 죽고 난 이후에 인생의 8부 능선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한 능선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 이사악을 결혼시키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사악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이사악의 배우자를 찾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하느님 앞에서 결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이사악의 아내를 구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사악의 결혼을 통해서 결혼이 무엇지에 알아야겠습니다. 첫째, 결혼이란 하느님 안에서 두 사람의 만남입니다. (창세24,2) 2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아보는, 집안의 가장 늙은 종에게 말하였다. “네 손을 내 샅(생식기)에 넣어라. 여기서 샅은 남성의 생식기를 뜻 합니다. 이것은 고대에 맹세하는 의식으로 만일 이 맹세를 어기면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결혼에 있어서 목숨을 걸고 지키라고 한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24,3-4) 3 나는 네가 하늘의 하느님이시며 땅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겠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가나안족의 딸들 가운데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지 않고, 4 내 고향, 내 친족에게 가서 내 아들 이사악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하여라.” 아브라함은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은 이방신을 섬기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신명7,3-4) 3 너희는 또한 그들(가나안사람)과 혼인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도 말고, 너희 아들에게 주려고 그들의 딸을 맞아들여서도 안 된다. 4 그런 짓은 너희의 아들이 나를 따르지 않고 돌아서서 다른 신들을 섬기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진노가 너희를 거슬러 타올라 주님께서 너희를 곧바로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사악이 반드시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까? 왜 우리자녀들을 믿는 사람에게 결혼시켜야 합니까? 또 사도 바오로는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해서도 반드시 믿음의 길로 인도하라고 하는 이유는 결혼이란 단순히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하느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신부를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결혼이란 나는 당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가 아닙니다. 만일 나는 당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했다가 그 사람에게 실망을 하면서 곧 두 사람의 관계는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하느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람이 결혼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라고 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사악과 레베카가 그렇습니다. 63절입니다. (창세24,63) 63 저녁 무렵 이사악이 들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눈을 들어 보니, 낙타 떼가 오고 있었다. 지금 이사악은 아브라함의 종이 그의 신부를 데리러 간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또 지금 이사악의 나이는 40살입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신부가 올까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가 오는 이런 상황에서도 이사악은 저물 때까지 들에서 하느님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신부가 오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사악은 신부를 사모(思慕)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64절과 65절을 보면 레베카가 하느님을 묵상하고 있는 이사악을 봅니다. 그리고 “그 종은 이사악에게 자기가 한 모든 일을 이야기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종이 행(行)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사랑하심과 성실함으로 인도하여 레베카를 만나게 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인도하셔서 신부를 데리고 온 일을 말했습니다. (창세24,27) 27 “나의 주인에게 당신 자애와 신의를 거절하지 않으셨으니,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이 몸을 내 주인의 아우 집에 이르는 길로 이끌어 주셨구나.” 그러니까 “67 이사악은 레베카를 자기 어머니 사라의 천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다. 이로써 이사악은 어머니를 여읜 뒤에 위로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사악은 그녀가 얼마나 얼굴이 예쁜가를 먼저 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도하셨다고 하니까 이사악이 레베카를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는 일부일처(一夫一妻)사회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일부다처(一夫多妻)였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사악만 일부일처입니다. 이사악은 하느님을 제일로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 레베카 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레베카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24,5) 5 그 종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그 여자가 저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드님을 나리께서 떠나오신 그 땅으로 데려가야 합니까?” 지금 아브라함의 종이 신부를 데리고 오는 길은 900키로가 됩니다. 이것은 서울과 부산 왕복거리가 됩니다. 당시에는 이 거리는 한 달은 더 걸리는 험한 길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종은 먼 거리를 신랑 얼굴도 보지 못하고 가자고 했을 때 어떻게 신부가 따라가 가겠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 신부가 가지 않으려면 다시 이사악을 신부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야합니까? 라고 종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창세24,6.8) 6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너는 내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8 그 여자가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너는 나에게 한 맹세에서 풀리게 된다. 다만 내 아들만은 그곳으로 데려가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이 신부를 구할 때 두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믿는 신부입니다. 둘째는 900키로나 되는 먼 길을 하느님만 바라보고 따라올 수 있는 신부입니다. 레베카가 이런 신부였습니다. 레베카는 900키로나 되는 먼 길인데 갈 수 있느냐고 했을 때 바로 가겠다고 합니다. 58 레베카를 불러 그에게 “이 사람과 같이 가겠느냐?” 하고 묻자, 그가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레베카가 왜 이렇게 신랑 얼굴도 모른 체 고향을 떠나서 먼 길을 따라서 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유도 오직 하느님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결혼이란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 서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결혼은 믿는 사람과 해야 합니다. 만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믿게 해야 합니다. 결혼이란 하느님 안에서 서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두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결혼한 사람의 경우에 나의 사랑의 수원지는 배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의 사랑의 수원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고 합니다. 과연 배우자에게서 완전한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 신혼 때 몇 년 간은 배우자에게서 사랑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사랑의 수원지는 하느님에게서 찾아야합니다. 오직 하느님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 하느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아내에게 흘려보내고 남편에게 흘려보내기 바랍니다. 둘째, 결혼이란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녀를 위한 것입니다. (창세24,3-4) 3 나는 네가 하늘의 하느님이시며 땅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겠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가나안족의 딸들 가운데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지 않고, 4 내 고향, 내 친족에게 가서 내 아들 이사악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하여라.” 아브라함은 내 아들 이사악을 위하여 이사악의 아내를 택하라고 합니다. 대부분 부모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자녀의 배우자를 생각할 때 자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얻게 될 사위가 나에게 어떻게 잘 해주겠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또 내가 얻게 될 며느리가 나에게 어떻게 잘 해주겠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부모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평생 이 자녀를 위하여 내 모든 것을 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결혼할 때도 자녀를 위하는 마음보다 부모를 위하는 마음이 더 앞섭니다. 그래서 부모를 위하여 자녀의 배우자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를 먼저 보냈기 때문에 허전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들여서 자신도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종에게 말하기를 나를 위한 이사악의 아내가 아니라 내 아들 이사악을 위하여 이사악의 아내를 택하라고 합니다. (창세2,24)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라고 합니다. 결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모를 섬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당연히 부모는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결혼이란 부모를 떠나 하느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자녀를 떠나 보내야 합니다. 내가 평생을 키운 자식인데, 어떻게 며느리에게 사위에게 뺏길 수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떠나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도 결혼할 때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경제적인 독립만 아니라 정신적인 독립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평생 떠나보내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통해서 사랑하는 아들도 떠나보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모든 사람들을 떠나보내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슬플 때가 기쁠 때나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결혼을 통해서 내 사랑하는 자녀를 떠나보내더라도 한 순간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한분만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셋째, 결혼이란 운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우리는 결혼의 배우자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내가 결혼할 배우자는 정확하게 미리 예정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분명히 하느님께서 이사악의 아내를 만나는데,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2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종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제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 오늘 일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 제 주인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은 물을 기를 때 자신에게만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여인이 있으면 14 “제가 ‘그대의 물동이를 기울여서, 내가 물을 마시게 해 주오.’ 하고 청할 때, ‘드십시오. 낙타들에게도 제가 물을 먹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 소녀가, 당신께서 당신의 종 이사악을 위하여 정하신 여자이게 해 주십시오. 그것으로 당신께서 제 주인에게 자애를 베푸신 줄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은 우물에서 자신만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레베카를 만납니다. 그래서 48 “무릎을 꿇어 주님께 경배하고 제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제 주인의 아우님 딸을 주인 아들의 아내로 얻을 수 있도록 저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고 합니다. 분명히 하느님께서 이사악의 아내를 구함에 있어서 하느님의 은혜가 있었고, 또 하느님의 정하심이 있었고,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선택하라”입니다. 그래서 3절과 4절과 7절과 37절과 38절과 40절에 보면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있어도 아브라함은 종에게 “선택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계적인 운명론이 아닙니다. 기계적인 운명론은 하느님께서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결혼할 사람이 무조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운명론 입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있어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예정(豫定)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구원 받기로 미리 정하신 사람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도 하느님께서 미리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와 결혼할지도 미리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운명론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나타난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예정이라고 하지 않고 하느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또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나타난 하느님의 인도하심은 무조건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복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 인간이 거부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면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복된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있어도 네가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결혼할 배우자가 미리 운명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내가 선택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도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결혼의 배우자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 내가 누구를 만날지 모릅니다. 또 누가 정해져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의 배우자를 만남에 있어서 하느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도와주심이 필요합니다. 그러하오니 하느님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도록 내 삶을 선하게 인도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이렇게 선택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우리는 ‘좀 더 좋은 배우자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선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나의 믿음의 그릇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느냐 입니다. 또한 나의 인격의 그릇이 얼마나 잘 준비되어 있느냐? 입니다. 운명론에 있어서는 나의 준비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있어서는 하느님 앞에서 나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의 그릇과 인격의 그릇이 준비된 만큼 나의 믿음과 인격의 그릇에 맞게 하느님은 인도하십니다. 또 사람을 선택할 때는 항상 내가 준비된 만큼 선택하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청년 때가 정말 중요합니다. 기계적 운명론에 따르면 나의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내 부모가 이렇게 힘들게 살았으니 나도 이렇게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운명론입니다. 우리의 삶은 세모다 네모다 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사악과 같이 믿음의 그릇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또레베카와 같이 인격의 그릇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의 배우자를 잘 만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배우자를 만남에 하느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처럼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구합시다. 그러면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도 운명이 아닙니다. 내가 평생을 이렇게 살았으니 나는 운명적으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하지 맙시다. 하느님은 기계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은 살아 계시고 인격적인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든지 돌이켜 하느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가면 우리의 삶은 얼마든지 달라지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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