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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37)죽음을 통해서 본 삶의 의미 (창세2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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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5-05 조회수277 추천수3 반대(0) 신고

창세기(37) 23. 5. 5.

 

죽음을 통해서 본 삶의 의미

 

(창세25,1-11)

1 아브라함은 다시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그의 이름은 크투라였다. 2 그는 아브라함에게 지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를 낳아 주었다. 3 욕산은 세바와 드단을 낳았다. 드단의 자손들은 아수르인, 르투스인, 르옴인이다. 4 미디안의 아들들은 에파, 에페르, 하녹, 아비다, 엘다아이다. 이들 모두가 크투라의 자손들이다. 5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이사악에게 물려주었다. 6 아브라함은 소실들이 자기에게 낳아 준 아들들에게도 한몫씩 나누어 주었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은 죽기 전에, 그들을 자기 아들 이사악에게서 떼어 동쪽 곧 동방의 땅으로 내보냈다.

7 아브라함이 산 햇수는 백칠십오 년이다. 8 아브라함은 장수를 누린 노인으로, 한껏 살다가 숨을 거두고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갔다. 9 그의 아들 이사악과 이스마엘이 그를 막펠라 동굴에 안장하였다. 이 굴은 마므레 맞은쪽, 히타이트 사람 초하르의 아들 에프론의 밭에 있었다. 10 이 밭은 아브라함이 히타이트 사람들에게서 사들인 것으로, 바로 이곳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안장되었다. 11 아브라함이 죽은 뒤에 하느님께서는 그의 아들 이사악에게 복을 내리셨다. 이사악은 브에르 라하이 로이에 자리 잡고 살았다.

 

메멘토모리라는 말이 무슨 말인 줄 아십니까? ‘죽음을 생각하라입니다. 로마시대 군인들이 승리하고 돌아오면 시민들이 환영을 합니다. 그때 뒤에서 외쳤던 소리가 메멘토모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생 최고의 승리의 순간에도 항상 죽음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영국에서 축구경기는 온 국민들이 함께 하는 축제입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프리미어축구 경기를 시작할 때 부르는 노래가 때 저물어날 이미 어두니 구세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하나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입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그렇게 달갑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4가 죽을 사()라고해서 4층이라고 하지 않고 F층이라고 부릅니다. 나이가 드신 분들도 빨리 죽어야지라고 하지만 그 말씀은 빨리 죽고 싶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젊은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말조차 듣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항상 죽음을 생각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가운데 가장 확실한 현실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선물입니다. 죽음을 생각해야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종교를 만들었습니까? 죽음 때문입니다. 왜 철학을 만들었습니까?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야합니까?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이란 우리가 회피해야 할 주제가 아닙니다. 죽음을 생각해야 내가 지금 왜 살아야하는가 하는 삶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삶이 어렵고 힘들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또 죽음이 선물인 이유는 죽음은 우리에게 평등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는 과정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신적으로 더 잘 살다가 죽는 사람이 있고, 또 힘들게 살다가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죽습니다. 권세가 높은 사람도 죽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를 모두 평등하게 만듭니다. 또 죽음이 선물인 이유는 죽음은 남겨진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내가 왜 살아가야하는가? 어떻게 살아야가야 하는가 하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聖經)에서는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좋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삶의 관점에서 죽음을 생각하면 우울하고 슬픕니다. 그러나 죽음의 관점에서 삶을 생각하면 삶은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25,7-8) 7 아브라함이 산 햇수는 백칠십오 년이다. 8 아브라함은 장수를 누린 노인으로, 한껏 살다가 숨을 거두고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갔다.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습니다. 75세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많이 실수를 했지만 100세에 이사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137세에 아내 사라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40세에 이사악을 결혼시켰습니다. 그리고 35년을 살아가 죽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죽음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죽음을 통해서 본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삶이란 하루입니다.

 

(창세25,7) 7 아브라함이 산 햇수는 백칠십오 년이다.

 

향년(享年 죽은이의 나이)이란 우리말로 하면 한 사람이 한평생 살아 누린 햇수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원어를 직역하면 그리고 이것들은 아브라함이 산 생명의 년들의 날들이라입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단순히 175년을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175년을 하루하루 살았다고 합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175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몇 년 살았는가? 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오래 살았으면 오래 살았다고 하고 오래 살지 못했으면 오래 못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사람이 몇 년을 살았던 그 사람은 하루 하루를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죽음을 통해서 본 삶의 의미는 매일 매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 매일 하루하루를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 말씀이 참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일을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내일 내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마태6,25.27.31.34)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예수님은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일 일은 내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염려해주십니다. 그러므로 한 날, 즉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우리에게 매일 매일 하루를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좋았던 과거의 어느 한 날을 생각합니다. 과거(過去)는 우리에게 오게 된 어느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 최고이 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 고대했던 내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제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 우리보다 돈이 많고 권세가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제 돌아가셨던 분들이 제일 부러웠던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 최고의 날은 오늘입니다.

우리 인생 최고의 날이 오늘인 이유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의 모든 날을 각기 나름대로 최고로 아름답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전도3,1-2.11) 1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2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1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 머리가 희어지는 것을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잠언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

 

(잠언16,31) 31 백발은 영광의 면류관 의로운 길에서 얻어진다. 라고 합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에서는 백발은 빛나는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 때는 어린아이대로 아름답습니다. 청년은 청년대로 아름답습니다. 장년은 장년대로 아름답습니다. 노년은 노년대로 아름답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때를 모두 각자 나름대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낮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콤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 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그대들에게.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제의 일은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지난 간 시간입니다. 내일 일은 우리가 감당 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몇 년을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주신 오늘 이 하루를 매일 최고의 날로 여기시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삶이란 여행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창세25,8) 8 아브라함은 장수를 누린 노인으로, 한껏 살다가 숨을 거두고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갔다.

 

아브라함은 장수를 누리고 한껏 살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장수를 누리고 한껏 살았다는 말은 토바라는 말로서 좋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몇 살을 살아야 좋은 나이까지 살았다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를 살아야 만족한 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100세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자 분들은 평균 90대 중반까지 살 수 있고, 남자 분들도 평균 90세는 사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좋고 만족한 나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죽어서 자기 선조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자기 선조는 하느님이 계신 하느님나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몇 살을 살더라도 우리가 죽어서 저 영원한 하느님나라로 간다면 우리의 나이는 좋은 나이고 만족한 나이입니다. 죽음이란 하느님이 계신 하느님나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낮에 신나게 놀다가 저녁이 되어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삶이란 여행(旅行)입니다. 목적지가 있는 여행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영원한 하느님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삶의 목적지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는 저 영원한 하느님나라가 우리 인생 여행의 분명한 목적지입니다.

또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누구와 여행하느냐 입니다. 우리에게는 동행자가 계십니다.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곁에 영원히 계신 보호자 성령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나의 벗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저는 이 시를 이렇게 바꾸어보았습니다.

나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 아침 이슬 같은 주님과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같은 주님과 단둘이서 놀다가 하느님께서 오라 손짓하시면 나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

주님과 동행하였던 이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나는 가서 주님께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세째, 삶이란 남기고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어서 하느님께로 돌아갔지만 아브라함은 이 땅에 신앙의 유산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열두 족장들이 나왔고, 예수님이 나왔고, 또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 우리도 나왔습니다.

우리도 죽으면 반드시 하느님나라에 갑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냥 죽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무언가 남기고 죽습니다.

() 이어령 교수님은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자신은 이 땅에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이냐를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어령 교수님은 자신은 말을 남기고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딸이 있는 하느님께로 돌아가지만 이 땅에 말을 남겨 그 말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의 이정표가 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창세25,1) 1 아브라함은 다시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그의 이름은 크투라였다.

 

이것에 대해서 학자들은 크투라사라가 죽고 난 다음에 얻은 후처인지. 사라가 살아 있을 때 얻은 후처인지를 잘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은 사라와 하갈 외에 크투라를 아내로 두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크투라를 통해서 여섯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사악과 이스마엘과 함께 8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만 아니라 서자들에게도 유산을 남겨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25,6) 6 아브라함은 소실들이 자기에게 낳아 준 아들들에게도 한몫씩 나누어 주었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은 죽기 전에, 그들을 자기 아들 이사악에게서 떼어 동쪽 곧 동방의 땅으로 내보냈다.

 

아브라함은 자기 서자(庶子)들에게도 재산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의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사악을 떠나서 동쪽 땅으로 가게 합니다.

당시에는 서자들에게는 재산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나누어 준 것은 아브라함이 죽고 난 다음에 재산 때문에 서로 싸우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브라함이 재산을 주고 난 다음에 아브라함이 죽기 전에 서자(庶子)들로 이사악을 떠나 동방으로 가게 합니다.

이것도 같이 있으면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에 이사악과 서자들 간에 서로 분쟁이 없게 하기 위해서 서자들을 동쪽 땅으로 떠나게 했습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이들에 대해서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니라 다 크투의 자손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들이 아브라함의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아브라함의 신앙을 물려받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지라도 다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2절에 보면 이들 중에서 미디안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이 미디안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끊임없이 괴롭힌 민족입니다. 또 아시리아가 나옵니다. 이 아시리아도 하느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멸망시킨 민족입니다.

 

(창세25,5) 5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이사악에게 물려주었다.

 

아브라함의 서자들에게는 물질적 재산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악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있는 모든 소유를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는 모든 소유란 아브라함의 물질적인 재산만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의 복도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 가운데서 이사악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의 복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있는 신앙의 유산을 이사악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첫째, 하느님 중심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야 산에서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려했습니다. 이때 이사악이 나이가 가장 예민한 나이인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이사악에게 내 삶은 나의 자존심이나 명예가 아니라 하느님이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둘째는 아브라함은 말씀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인 갈대아 우르에서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 따라서 가나안땅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친교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서 하느님과 친교하는 헤브론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동서남북으로 네가 밟는 땅을 다 주겠다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셔도 아브라함은 헤브론에서 하느님과 친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손들에게 물질의 유산만을 남겨두면 그 자손들 중에 하느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손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남겨줄 것은 무엇보다 신앙의 유산(遺産)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이사악에게 하느님 중심과 말씀 중심의 신앙을 물려주었습니다.

 

(창세25,11) 11 아브라함이 죽은 뒤에 하느님께서는 그의 아들 이사악에게 복을 내리셨다. 이사악은 브에르 라하이 로이에 자리 잡고 살았다.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하느님은 살아계셔서 이사악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 복이 하느님께서 이사악과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이사악은 브에르 라헤로이 근처에 거주하였습니다.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이 사라에게 쫓겨서 광야에서 울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그를 자비로이 여겨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을 브에르라헤로이 살아계셔서 나를 살피시는 하느님의 우물이라고 했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죽고 이사악이 살아계셔서 나를 살피시는 하느님의 우물이라는 브에르라헤로이 근처에 살았습니까? 하갈과 같이 하느님께서 택하지 않은 자라도 그의 눈물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살펴주셨던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인 나를 반드시 살펴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어도 하느님은 살아계셔서 이사악을 살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무엇보다 하느님중심 말씀중심의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는 성도(聖徒)들이 되어서 다음 세대들이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고 살펴주시는 복을 받읍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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