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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39) 우물을 파는 이사악 (창세26,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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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5-07 조회수409 추천수2 반대(0) 신고

 

 

창세기(39) 23. 5. 7.

 

우물을 파는 이사악

 

(창세26,1-33)

1 일찍이 아브라함 시대에 기근이 든 적이 있었는데, 그 땅에 또 기근이 들었다. 그래서 이사악은 그라르로 필리스티아 임금 아비멜렉에게 갔다. 2 주님께서 이사악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땅에 자리 잡아라. 3 너는 이 땅에서 나그네살이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너에게 복을 내려 주겠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고,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루어 주겠다. 4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불어나게 하고,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겠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에 순종하고, 나의 명령과 나의 계명, 나의 규정과 나의 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6 이리하여 이사악은 그라르에 살게 되었다.

7 그런데 그곳 사내들이 자기 아내에 대하여 묻자, 이사악은 내 누이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레베카가 예뻐서 이곳 사내들이 레베카 때문에 나를 죽일지도 모르지.’ 하고 생각하였기에, “내 아내요.” 하고 말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8 이사악이 그곳에 산 지 꽤 오래된 어느 날, 필리스티아 임금 아비멜렉이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이사악이 자기 아내 레베카를 애무하고 있었다. 9 그래서 아비멜렉이 이사악을 불러 말하였다. “그 여자는 그대의 아내임이 분명한데, 그대는 어째서 그 여자는 내 누이요.’ 하고 말하였소?” 이사악이 그에게 그 여자 때문에 제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10 아비멜렉이 말하였다. “그대는 어쩌자고 우리에게 이런 일을 저질렀소? 하마터면 백성 가운데 누군가 그대 아내와 동침하여, 우리를 죄에 빠뜨릴 뻔하지 않았소?”

11 그러고서 아비멜렉은 온 백성에게 경고하였다. “이 남자와 이 여자를 건드리는 자는 사형을 받을 것이다.” 12 이사악은 그 땅에 씨를 뿌려, 그해에 수확을 백 배나 올렸다.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듯 복을 내리시어, 13 그는 부자가 되었다. 그는 점점 더 부유해져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다. 14 그가 양 떼와 소 떼와 많은 하인을 거느리자, 필리스티아인들이 그를 시기하였다. 15 그래서 필리스티아인들은 이사악의 아버지 아브라함 시대에 이사악 아버지의 종들이 판 우물을 모두 막고 흙으로 메워 버렸다.

16 아비멜렉이 이사악에게 말하였다. “이제 그대가 우리보다 훨씬 강해졌으니, 우리를 떠나 주시오.” 17 그래서 이사악은 그곳을 떠나 그라르 골짜기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18 이사악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시대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 이것들은 아브라함이 죽은 뒤에 필리스티아인들이 막아 버린 우물들이다. 이사악은 그 우물들의 이름을 자기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 그대로 불렀다. 19 이사악의 종들이 그 골짜기를 파다가, 생수가 솟는 우물을 발견하였다. 20 그러자 그라르의 목자들이 그 물을 자기네 것이라고 하면서, 이사악의 목자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리하여 우물을 두고 싸웠다 해서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다. 21 이사악의 종들이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라르의 목자들이 그것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시트나라 하였다. 22 이사악이 그곳에서 자리를 옮겨 또 다른 우물을 팠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넓은 곳을 마련해 주셨으니, 우리가 이 땅에서 퍼져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하면서,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였다.

23 그는 그곳을 떠나 브에르 세바로 올라갔는데, 24 그날 밤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종 아브라함을 보아서, 내가 너에게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의 수를 불어나게 하겠다.” 25 그는 그곳에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이사악은 그곳에 천막을 치고 그의 종들은 그곳에서도 우물을 팠다. 26 아비멜렉이 친구 아후잣과 자기 군대의 장수 피콜과 함께 그라르에서 이사악에게로 왔다. 27 이사악이 그들에게 그대들은 나를 미워하여 쫓아내고서, 무슨 일로 나에게 왔소?” 하고 물으니, 28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계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소. 그래서 우리 사이에, 곧 우리와 그대 사이에 서약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소. 우리는 그대와 계약을 맺고 싶소. 29 우리가 그대를 건드리지 않고 그대에게 좋게만 대해 주었으며 그대를 평화로이 보내 주었듯이, 그대도 우리한테 해롭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오. 이제 그대는 주님께 복 받은 사람이오.” 30 이사악은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함께 먹고 마셨다. 31 그들은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서로 맹세하였다. 그런 다음 이사악이 그들을 보내자, 그들은 평화로이 그를 떠나갔다.

32 바로 그날 이사악의 종들이 와서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그에게 알리며, “저희가 물을 발견하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이사악은 그 우물을 시브아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 성읍의 이름이 브에르 세바이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중에서 이 땅에서 육신적인 복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야곱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이 가장 육신적인 복을 제일 많이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악이 육신적인 복을 제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아브라함이고, 마지막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파라오에게 자신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창세47,9)고 했습니다.

 

(창세26,12-13) 12 이사악은 그 땅에 씨를 뿌려, 그해에 수확을 백 배나 올렸다.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듯 복을 내리시어, 13 그는 부자가 되었다. 그는 점점 더 부유해져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다.

 

이사악은 원래 농사를 하던 사람이 아닙니다. 대대로 가축을 치던 유목민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그라르 지역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에 백배나 얻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서 백배가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하지만 저는 실재로 백배나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이사악에 육신적으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점점 더 부유하게 하셔서 마침내 거부(巨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잘 되고 복을 받으면 그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육신적으로 잘 되고 복을 받으면 이것은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고 복이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육신적인 복 때문에 하느님을 섬긴다면 그것은 기복주의적인 신앙입니다. 또 육신의 복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고 섬긴다면 그것도 기복주의적인 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잘 되는 것만 아니라 육신적으로 잘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 육신적으로도 복을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중에서 이사악이 육신적으로도 복을 제일 많이 받았습니다.

육신적인 복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단순히 재물만 늘어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가정의 복도 육신의 복입니다. 이사악은 가정의 복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악은 늦은 나이에 결혼했지만 레베카를 아내로 맞아 그만 사랑하였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12절에서 33절을 보면 이사악은 사람의 복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원의 복은 절대 우리의 인간적인 행위나 조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육신의 복은 항상 우리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것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은 바벨탑을 통해서 세상나라를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12장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녀가운데서 이사악만 하느님의 선택받는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또 이사악의 자녀가운데서 야곱만 선택받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면 왜 하느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이 세상과는 정 반대가 하느님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 세상과는 정 반대가 되는 하느님이 통치하시고 지배하시고 다스리는 하느님나라에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나라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하느님나라는 세상나라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야곱처럼 남을 속여서라도 악착같이 육신의 복을 받으려 해야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습니다. 야곱처럼 무조건 남을 짓밟고 이겨야지만 이 세상에서는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세상과는 완전히 반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7세에서 20세 초반으로 추정이 되는 청소년 시절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어디론가 제사를 드리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이사악은 아무 말 없이 아버지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사악은 아버지 제사를 드리는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 아브라함은 번제할 양은 하느님께서 친히 다 준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번제할 어린 양이 바로 이사악 이었습니다.

창세기229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아들 이사악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17-120살 정도 됩니다. 이사악은 17-20세정도 됩니다. 우리 같으면 과연 순순히 결박을 당하겠습니까? 힘으로 한다면 얼마든지 아버지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순순히 결박을 당합니다. 그리고 나무 위에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사악을 죽이려는 시늉만 낸 것이 아닙니다. 정말 아브라함을 칼로 죽이려 했습니다. 또 우리 같으면 여태까지는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아버지가 그를 죽이려 할 때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마디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아버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왜 죽이려 하십니까?”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사악은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또 늦은 나이인 40살이 되어도 이사악은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때도 하느님을 묵상하다가 레베카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얼굴이 어떠한가를 보다 하느님께서 인도하셨다고 하니까 그녀를 사랑하여 아내로 삼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습니다. 그래도 20년 동안 기도하여 야곱을 낳습니다.

 

(창세26,1) 1 일찍이 아브라함 시대에 기근이 든 적이 있었는데, 그 땅에 또 기근이 들었다. 그래서 이사악은 그라르로 필리스티아 임금 아비멜렉에게 갔다.

 

창세기12장에서 아브라함이 처음 가나안 땅에 갔을 때 그 땅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사악도 그와 같은 흉년이 들어서 블레셋 왕인 아비멜렉이 있는 그라르로 갑니다. 그라르는 가나안 땅 가장 남쪽으로 애굽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악도 아브라함처럼 흉년이 드니까 가나안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가고자했습니다.

 

(창세26,2) 2 주님께서 이사악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땅에 자리 잡아라.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이 애굽으로 내려갈 줄 아시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이 가나안 땅에 거주(居住)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26,3-4) 3 너는 이 땅에서 나그네살이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너에게 복을 내려 주겠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고,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루어 주겠다. 4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불어나게 하고,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겠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애굽으로 가지 말고 힘들더라도 이 땅에 거류하면 하느님께서 네가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이삭이 어떻게 합니까?

 

(창세26,6) 6 이리하여 이사악은 그라르에 살게 되었다.

 

2절에 내가 네게 지시는 땅3절에 이 땅과 6절에 그리르에 밑줄을 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지시하는 땅은 지금 이사악이 있는 그라르 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흉년이 들어서 힘이 들어서 가나안 땅의 끝이라 할지라도 이 땅에 살아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코로나 이후에 경제적으로 먹고 살기가 아무리 힘이 들어도 세상으로는 가지 말고 교회는 떠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먹고 살기가 힘이 들어도 신앙은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이사악은 그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그런데 7절에서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라르 땅에 있지만 아내 레베카로 인해서 자기가 죽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누이로 속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이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 8-11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런 이사악을 지켜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26,12) 12 이사악은 그 땅에 씨를 뿌려, 그해에 수확을 백 배나 올렸다.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듯 복을 내리시어,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적으로도 잘 살 수 있는 비결은 이 세상나라 사람들처럼 살아가지 않고 이 세상나라와 다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이 세상나라와는 다르게 하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이런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이사악의 삶은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마태16,24)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악이 이렇게 하느님께 육신적으로도 100배의 복을 받게 된 비결은 이사악은 이미 청소년 시절에 자신을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도 이사악과 같이 육신적으로도 100배의 복을 받으며 살아가기 위해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그런데 이렇게 이사악이 그 땅에서 100배나 복을 받고 살았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창세26,13-15) 13 그는 부자가 되었다. 그는 점점 더 부유해져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다. 14 그가 양 떼와 소 떼와 많은 하인을 거느리자, 필리스티아인들이 그를 시기하였다. 15 그래서 필리스티아인들은 이사악의 아버지 아브라함 시대에 이사악 아버지의 종들이 판 우물을 모두 막고 흙으로 메워 버렸다.

 

당시에 우물은 생명 줄과 같습니다. 사람만 아니라 가축과 농사를 짓는데 우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악이 육신적으로 100배나 복을 받는 것을 보면서 블레셋 사람들은 시기하여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웁니다. 여기서 우물을 메운다는 것은 서로 싸우겠다는 전쟁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 떠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를 떠나지 않으면 싸워서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이곳을 떠나라고 합니다(블레셋의 모든 왕은 아비멜렉입니다).

그러니까 17절에 그래서 이사악은 그곳을 떠나 그라르 골짜기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라고 합니다. 우리 같으면 끝까지 싸워서라도 우리 우물을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싸우지 않고 그곳을 떠나서 그라르 골짜기에서 삽니다. 그리고 18절에 그곳에서도 다시 우물을 팝니다.

그러니까 19절에 그 골짜기에서도 샘이 나옵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또 그라르 목자(牧者)들이 이사앗의 목자와 서로 싸웁니다. 그러면서 이 물을 우리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다툼이라는 뜻에서 에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21절에 보면 이사악은 또 다른 우물을 팝니다. 그들이 또 이 우물을 가지고 서로 다툽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곳의 이름을 증오라는 뜻에서 시트나라고 합니다.

또 이사악은 22절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다른 우물을 팝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들이 다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다는 뜻에서 그곳의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합니다. 넓다는 것은 성경에서 마음이 여유롭다 너그럽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악은 마음이 넓고 너그럽다는 르호봇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퍼져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싸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겨서 승리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방법입니다. 이런 방법은 계속해서 끊임없는 싸움을 만들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입니다. 싸우지 않고 상대방이 우리에게 평화를 청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26-31절에 나옵니다. 르호봇에서도 하느님께서 샘물이 나오게 하는 것을 보고 아비멜렉은 찾아와서 서로 화평(和平)을 청합니다. 그래서 이사악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사악이 어떻게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삶과, 다툼과 증오의 세상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그 비결은 이사악은 끊임없이 우물을 팠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싸움을 걸어옵니다. 그리고 증오합니다. 우물을 메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사악은 우물만을 팝니다. 그래서 결국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사악은 다투지 않고 생명을 얻는 일을 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우물은 생명입니다. 우물은 이사악만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축과 온 땅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기지 않고 승리하는 비결은 끊임없이 싸우는 이 세상에서 생명을 추구하는 길입니다. 그것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찾는 길입니다(예레2,13).

누가 우리 에게 싸움을 걸어와도 생명의 우물을 파는 일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찾는 일입니다. 그래서 생수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길입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자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또 서로 싸우지 말자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평화롭게 지내자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부흥(다시 일어남, 회복)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부흥(復興, 회복)하기 위해서 세 가지가 있어야한다.

첫째는 갈증(渴症)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름과 같이 우리가 끊임없이 생수의 근원하신 하느님을 찾는 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갈증을 채워주셔서 우리를 다툼이라는 에섹과 증오라는 시트나를 뛰어 넘어 너그러움이라는 르호봇으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둘째는 긍정(肯定)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적으로 잘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으되 하느님으로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느님은 무엇이지 할 수 있다는 절대 긍정의 신앙을 가집시다.

셋째는 열정(熱情)입니다.

열정이란 실패했어도 또 다시 시도 할 수 있는 힘입니다. 넘어져도 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입니다. 절망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실패했어도 또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열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 충만 밖에 없습니다.

23절을 보면 이사악은 모든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신 르호봇에 머물지 않고 브엘세바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24절에 그곳에서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에게 복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25절에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야훼 이름을 부르고 하느님께 예배합니다. 그리고 이사악의 종들이 그곳에서도 우물을 팝니다. 그리고 32절에 그 브엘세바에서도 물을 얻습니다. 이사악이 다툼이라는 에섹과 증오라는 시트나를 벗어나서 너그러움이라는 르호봇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느님께 예배하는 브엘세바에 올라갑니다.

왜 그곳에서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고, 그 곳에 장막을 치며, 그곳에 우물을 파고 물을 얻습니까? 우리 같으면 다툼과 증오가 해결이 되고 서로 너그러운 마음만 가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된 것이 아닙니까? 이사악은 르호봇에 머물지 않고 브엘세바에 천막을 치고 사는 이유는 하느님이 아니면 인간관계는 얼마든지 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갈등과 다툼과 증오가 생기면 그럴수록 하느님께 예배하는 곳으로 날마다 달려갑니다. 예배하는 곳에서 생수의 근원하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성령으로 충만합니다. 머리속에 하느님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가슴으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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