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40) 실수(失手)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 (창세27,1-4) | |||
---|---|---|---|---|
이전글 | 너무 가까이 있는 것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1| | |||
다음글 |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말씀 안에 머물고, 되새길 때 성령께서 일하신다. (요한14,1 ... |1| | |||
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5-08 | 조회수27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40) 23. 5. 8. 월 실수(失手)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 (창세27,1-4) 1 이사악은 늙어서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큰아들 에사우를 불러 그에게 “내 아들아!” 하고 말하였다. 에사우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 그가 말하였다. “네가 보다시피 나는 이제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3 그러니 이제 사냥할 때 쓰는 화살 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 나를 위해 사냥을 해 오너라. 4 그런 다음 내가 좋아하는 대로 별미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그것을 먹고, 내가 죽기 전에 너에게 축복하겠다.” 창세기 27장을 보면 하느님의 택하심을 받은 인간들의 실수가 나옵니다. 먼저 이사악의 실수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또 레베카의 실수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또 야곱의 실수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 아주 모범적인 신앙인들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사악의 가정은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가정을 모범으로 하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인간의 실수와 연약에 대해서 절대 감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 인간의 위대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실수를 보았습니다. 그는 두 번 씩나 아내를 누이로 속였던 사람입니다. 또 자녀를 기다리지 못해서 이스라엘을 낳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사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27,1) 1 이사악은 늙어서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큰아들 에사우를 불러 그에게 “내 아들아!” 하고 말하였다. 에사우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이사악이 늙었다고 하는데 이때 이삭사악의 나이가 137세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사악이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육신(肉身)의 눈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있지만 영(靈)적인 눈이 어두워서 잘 분별하지 못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사악은 너무나 모범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동안 이사악이 살아왔던 신앙과 삶의 모습을 보면 이사악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사악은 나이가 많아서 도리어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창세27,2) 2 그가 말하였다. “네가 보다시피 나는 이제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이사악은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에 죽을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실재 이사악이 죽을 때가 다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35장에 이사악은 180세에 죽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43년을 더 삽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말합니까? 나이가 들고 몸이 좋지 않으니까 곧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악은 자녀들에게 죽기 전에 축복을 하려고 합니다. (창세27,3-4) 3 그러니 이제 사냥할 때 쓰는 화살 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 나를 위해 사냥을 해 오너라. 4 그런 다음 내가 좋아하는 대로 별미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그것을 먹고, 내가 죽기 전에 너에게 축복하겠다.” 이사악은 에사우에게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가서 사냥을 하여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가 죽기 전에 에사우에게 축복을 하려고 합니다. 창세기25장에 보면 에사우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큰 자인 에사우는 작은 자인 야곱을 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는 크고 강한 자인 에사우는 버리시고, 야곱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복을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레베카에게 주셨는데, 이사악도 이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 하느님의 말씀대로 야곱에게 축복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에사우를 불러서 축복하려고 합니다. 이유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야곱보다는 에사우가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에사우는 야곱보다 더 남자다웠습니다. 그래서 사냥을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악은 고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엄마 곁에서 팥죽이나 끓이는 야곱보다 사냥하여 고기를 가져다주는 에사우가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더욱이 3절을 보면 이사악은 ‘내가’라는 말을 5번합니다. 그러니 이사악은 나이가 들어서 자기중심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자신을 위해서 맛있는 고기를 잡아줄 에사우에게 축복을 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 이사악은 에사우만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레베카는 야곱만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레베카가 야곱만을 사랑한 이유는 먼저 하느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셔서 선택하셨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야곱은 에사우와는 달리 아주 가정적입니다. 조용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잘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장자의 명분을 얻고자 할 정도로 신앙적입니다. 그런데 에사우는 거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도 없습니다. 그래서 팥죽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장자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무엇보다 창세기26장 34절에 보면 에사우는 자기 마음대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가나안 족속의 두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35절에 “이들은 이사악과 레베카에게 근심거리가 되었다.”라고 합니다. (창세27,5) 5 레베카는 이사악이 아들 에사우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 있었다. 그래서 에사우가 사냥하러 들로 나가자, 레베카는 이사악이 에사우에게 축복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면 레베카가 이사악에게 그러지 말라고 해야 합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셔서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남편 이사악에게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축복하라고 하셨는데 왜 그러십니까?” 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레베카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야곱에게 아버지 이사악을 속여서라도 축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염소새끼를 가져오면 내가 요리를 해 줄 테니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 이사악에게 가서 축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어머니 레베카에게 “만일 아버지 이사악이 알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니까 13절에 레베카가 “내 아들아,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 너는 그저 내 말을 듣고, 가서 짐승이나 끌고 오너라.”고 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형은 털이 많은 사람이고 나는 없는데,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매끈한 곳에 입게 함으로 아버지 이사악을 속이게 합니다. 레베카 동기는 좋았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말씀대로 야곱이 축복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레베카의 방법이 옳지 않았습니다. 목적이 옳고 정당하면 방법은 거짓을 해서도 된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목적이 정당하면 방법도 정당하고 옳아야합니다. 레베카가 야곱에게 거짓된 방법을 말하지 않았어도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레베카는 하느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짓된 방법을 사용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이 사건 이후로 레베카는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야곱은 20년 동안 에사우에게 쫓기는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또 야곱의 실수가 나옵니다. 야곱이 어머니 레베카의 말을 들었을 때 “어머니 그러시면 않됩니다. 이것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고 했어야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머니 레베카의 말을 따릅니다. 그래서 아버지 이사악에게 자신이 에사우라고 속이고 자신에 축복을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사악이 보니까 에사우가 나간지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느냐고 하니까 20절에 ““아버지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일이 잘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하느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이사악을 속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야곱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에사우가 야곱을 죽이려고 한(恨)을 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야곱은 이 사건 이후로 20년 동안 에사우에게 쫓기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그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것보다 더하게 외삼촌 라반에게서 10번씩이나 속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말년에 파라오에게 “자신의 삶은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사악의 가정은 하느님의 택하심을 받은 가정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이사악의 가정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가정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만을 사랑하고, 어머니는 작은 아들만을 사랑하는 역기능적인 가정입니다. 또 형이 아우를 죽이려고 하는 깨어진 가정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실수가 많은 이삭을 선택하셨습니까? 왜 야곱을 선택하셨습니까? 왜 선택받은 믿음의 가정이 역 기능적인 가정이고, 깨어진 가정입니까?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이렇게 해도 된다는 말씀이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본문에서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가정의 실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본문을 통해서 나타나는 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실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 인간은 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도 인간은 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선택이란 하느님께서 보시면 괜찮은 사람을 선택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 나서 선택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전1장에 보면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1코린1,27-29) 27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8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9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크고 강(强)한 자인 에사우를 버리시고 약(弱)하고 작은 자인 야곱을 선택하신 이유는 선택받은 인간으로 하여금 아무 것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누구보다 더 낫기 때문에 선택받아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자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선택받은 우리에게 “네가 선택을 받았느냐 그렇다면 인간적으로 아무 것도 자랑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너는 아무 별 수 없는 인간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선택받은 우리가 모두 별 수 없는 인간들인데, 어떻게 이런 우리를 하느님께서 받아주신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恩惠)와 자비(慈悲)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16절을 보면~ (로마9,16)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택하심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우리의 의지로 예수님을 믿어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보다도 더 의롭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입니다. 둘째,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만일 오늘 본문에서 이사악이 137세가 되었어도 눈이 밝고 하느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사악이 이렇게 나이가 많아도 눈이 밝고 건강하니 선택받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의 실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사악의 모든 삶이 다 하느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악이 태어날 수 없었는데 태어난 것도 다 하느님의 은혜였습니다. 그가 청소년 시절에 자신을 바칠 수 있었던 것도 다 하느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사악의 결혼도 다 하느님의 은혜였습니다. 또 이사악이 땅에서 100배의 복을 받은 것도 다 하느님의 은혜였습니다. 끝까지 우물을 파다가 모든 관계의 문제가 해결된 것도 다 하느님의 은혜였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예전에 잘 나갔을 때 그것이 네가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약하다고 하는 것은 절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눈이 나이가 들어서 눈이 어둡다는 것, 나이가 들어서 귀가 어둡다는 것, 또 나이가 들어서 힘이 없다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바오로에게도 끊임없이 따라다녔던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것을 없애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고후12:9-10). 그래서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약함을 자랑하시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이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의 통로가 되고 하느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인간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돌보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악이 실수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하느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28절에 이사악이 야곱을 에사우라고 생각하고 한 축복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을 내려 주시리라. 땅을 기름지게 하시며 곡식과 술을 풍성하게 해 주시리라.”고 합니다.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과 곡식과 포도주는 농사를 짓는 자에게 주는 축복입니다. 에사우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아닙니다. 들에서 사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악이 야곱을 에사우라고 생각하고 축복한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네 팔의 힘이 강하여 너는 활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너를 당하여 이길 자가 없으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사악은 에사우인줄 알고 축복하는데, 그 내용은 농사꾼인 야곱에게 하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악이 실수로 에사우에서 축복을 하려고 하였으나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축복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사우가 왔을 때 앞에서 축복한 자가 야곱인 줄 알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33. 이사악이 깜짝 놀라 몸을 떨면서 말하였다. “그렇다면 사냥을 해서 나에게 고기를 가져온 자는 누구란 말이냐? 네가 오기 전에 나는 이미 그것을 다 먹고, 그에게 축복해 주었다. 그러니 그가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사악이 ‘깜짝놀랐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났을 때의 두려움입니다. 이사악이 비록 실수로 축복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하느님이 간섭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악은 하느님이 두려워서 심히 떨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택하신 자녀가 어떻게 그렇게 실수할 수 있느냐 그렇게 실수하면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인간이 실수해도 하느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실수해도 하느님은 여전히 지금도 하느님의 일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벨론포로로 잡혀 갔을 때 그들은 약했습니다.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곤하여 지쳤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이사40,28-31) 28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9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하느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으시고 넘어지지 않습니다. 실수하고 넘어져도 오직 야훼를 바라보며(仰望)살아 갑시다. 그래서 실수하고 넘어진 자리에서 또 일어서고 일어설 수 있는 우리들이기를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