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5주간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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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5-09 | 조회수41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요한 14,27-31ㄱ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예수님 시대에 전 세계를 주름잡던 로마제국은 자기들이 이룬 성과의 하나로 ‘로마의 평화’를 널리 선전했습니다. 자기들이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점령지역을 잘 통치한 덕분에 그곳에서 분쟁들이 발생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이 이룬건 강력한 힘으로 약한 이를 굴복시킴으로써 얻은 잠시의 안정일 뿐, 다수의 약자들을 희생시켜 소수의 강자들이 누리는 세속적인 이익일 뿐, 참된 의미에서의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서로의 마음이 편할 리도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마음이 산란해지고, 그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늘 걱정과 두려움 속에 살게 될 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세속적인 평화가 아닌, 참된 평화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외부’의 힘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억지로 짓누르는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폭력’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는 ‘안’, 즉 내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평화이지요. 그렇다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담대함’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는 비장한 각오의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요? 물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면, 즉 죽기를 각오하면 왠만한 상황에서는 담담할 수 있기는 합니다. 최악을 각오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최악을 각오한만큼, 그보다 덜 나쁜 상황은 오히려 ‘좋은’ 것으로 여겨지기에 흔들릴지언정 버틸 수는 있는 겁니다. 또한 ‘산전수전’ 다 겪어가며 단련될수록, 오랜 수양을 통해 마음을 다잡을수록 내 마음의 힘으로 버텨낼 수 있는 한계치가 커질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버티는데에도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고 마음에 잔뜩 쌓아놓기만 한 분노가 언젠가 ‘펑’하고 터져 내 마음을 완전히 무너뜨리듯, 내 힘으로 억지로 버텨가며 유지하고 있는 팽팽한 긴장상태는 내가 힘들고 지쳐서 그 끈을 놓아버리는 순간 홍수 때에 무너지는 둑처럼 한 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것이지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평화는 그처럼 불완전하고 제한적이어서는 안됩니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무너지지 않으며 영원히 지속될 진짜 평화를 갈망하고 추구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 평화는 오직 주님께서만 주실 수 있습니다. 나와 주님이 인격적으로 맺는 사랑의 친교 안에서,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굳게 믿는 나의 믿음 안에서 그 참된 평화가 우러나오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참된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련과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혹여 주님께서 정말 지금 내 곁에 계시지 않더라도 아버지께 가셨다가 다시 내게 오실 것임을, 그래서 나와 언제나 함께 계실 것임을 굳게 믿기에 항상 마음이 든든하고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명령대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이’ 기쁘게 살 수 있지요. 결국 이 모든건 우리의 ‘믿음’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것들에 믿음을 두지 않고 오직 주님만 믿고 신뢰할 때, 그분께서 나에게 위로와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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