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42) 인도(引導)하심과 사랑하심 (창세29,1-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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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5-10 | 조회수30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42) 23. 5. 10. 수 인도(引導)하심과 사랑하심 (창세29,1-35) 1 야곱은 발걸음을 옮겨 동방인들의 땅으로 들어갔다. 2 그가 보니 들에 우물이 하나 있고, 양 떼 세 무리가 그 곁에 엎드려 있었다. 그것은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우물인데, 그 우물 위에는 큰 돌이 덮여 있었다. 3 가축들이 그곳에 다 모이면 목자들은 우물에서 그 돌을 굴려 내어 양 떼에게 물을 먹인 다음, 그 돌을 다시 우물 위 제자리로 돌려 놓는 것이었다. 4 야곱이 그들에게 “형제들, 그대들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고 묻자, 그들이 “우리는 하란에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가 또 “나호르의 아들 라반을 알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그들이 “압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야곱이 다시 “그분은 잘 계십니까?” 하고 묻자, 그들이 “잘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의 딸 라헬이 양 떼를 몰고 오는군요.” 하고 대답하였다. 7 그러자 야곱이 말하였다. “아직 한낮이라 짐승들을 모아들일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어서 가서 풀을 뜯게 하셔야지요.” 8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렇게 할 수가 없답니다. 가축들이 다 모여든 다음에야 우물에서 돌을 굴려 내고 양 떼에게 물을 먹이게 되어 있습니다.” 9 야곱이 아직도 그들과 말하고 있을 때, 라헬이 아버지의 양 떼를 몰고 왔다. 그는 양치는 여자였다. 10 야곱은 자기 외숙 라반의 딸 라헬과 외숙 라반의 양 떼를 보자, 다가가 우물에서 돌을 굴려 내고, 자기 외숙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11 그런 다음 야곱은 라헬에게 입 맞추고 목 놓아 울었다. 12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자기가 그 아버지의 혈육이고 레베카의 아들임을 밝혔다. 라헬은 달려가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13 라반은 자기 누이의 아들 야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달려 나가 그를 껴안고 입 맞추고는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야곱이 라반에게 자기의 일을 모두 들려주자, 14 라반이 그에게 말하였다. “정녕 너는 내 골육이다.” 이리하여 야곱은 그 집에 한 달 동안 머물렀다. 15 하루는 라반이 야곱에게 물었다. “네가 내 혈육이기는 하지만, 내 일을 거저 해 줄 수야 없지 않으냐? 네 품값이 얼마면 되겠는지 나에게 말해 보아라.” 16 라반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큰딸의 이름은 레아였고 작은딸의 이름은 라헬이었다. 17 레아의 눈은 생기가 없었지만, 라헬은 몸매도 예쁘고 모습도 아름다웠다. 18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외삼촌의 작은딸 라헬을 얻는 대신 칠 년 동안 외삼촌 일을 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9 라반이 말하였다. “그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너에게 주는 것이 낫겠다. 그러면 내 집에 머물러라.” 20 야곱은 라헬을 얻으려고 칠 년 동안 일을 하였다. 이것이 그에게는 며칠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가 그만큼 라헬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21 마침내 야곱이 라반에게 말하였다. “기한이 찼으니 제 아내를 주십시오. 같이 살겠습니다.” 22 그러자 라반은 그곳 사람들을 모두 청해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23 저녁이 되자 그는 딸 레아를 야곱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한자리에 들었다. 24 라반은 자기의 여종 질파를 딸 레아에게 몸종으로 주었다. 25 그런데 아침에 보니, 레아가 아닌가! 야곱이 라반에게 말하였다.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라헬을 얻는 대신 외삼촌 일을 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26 라반이 대답하였다. “우리 고장에서는 작은딸을 맏딸보다 먼저 주는 법이 없다. 27 이 초례 주간을 채워라. 그리고 네가 다시 칠 년 동안 내 일을 해 준다면 작은애도 우리가 너에게 주겠다.” 28 야곱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초례 주간을 채웠다. 그러자 라반은 자기의 딸 라헬을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29 라반은 자기의 여종 빌하를 딸 라헬에게 몸종으로 주었다. 30 야곱은 라헬과도 한자리에 들었다. 그는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다. 그는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의 일을 하였다. 31 주님께서는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다. 그러나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었다. 32 레아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러고는 “주님께서 나의 괴로움을 보아주셨구나.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해 주겠지.” 하면서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였다. 33 그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러고는 “주님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들으시고, 나에게 이 아들도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시메온이라 하였다. 34 그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내가 이렇게 아들을 셋이나 낳아 주었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에게 매이겠지.”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다. 35 그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송하리라.”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아기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다. 그러고서는 그의 출산이 멈추었다. 창세기29장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인도하시고,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인 우리를 지금도 인도하고 계시고, 또 사랑하고 계십니다. (창세29,1) 1 야곱은 발걸음을 옮겨 동방인들의 땅으로 들어갔다. 창세기28장에서 이사악은 야곱에게 믿지 않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지 말고 하란으로 가서 외삼촌 라반의 딸과 결혼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란으로 가고자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광야에서 야곱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느님께서 이 곳에서도 나와 함께 계심을 깨닫고 그곳의 이름을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에서 베텔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동방 사람의 땅이란 하란에 가까운 곳입니다.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이곳까지 800킬로나 되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거의 한 달이 걸리는 길입니다. 그리고 2절과 3절을 보면 야곱이 우물을 만났습니다. 그 우물곁에 양 세 떼가 누워있습니다. 그 곁에 목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물은 큰 돌로 덮어져 있습니다. 왜 큰 돌을 치우고 양 떼를 먹이면 되는데 물을 먹이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모든 양떼가 다 모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양 떼가 다 모이면 돌을 옮기고 물을 먹이려합니다. 그리고 4절에 야곱이 그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합니다. 그들이 ‘하란에서 왔다’고 합니다. 지금 야곱은 하란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놀랍게도 하란에서 온 사람을 만납니다. (창세29,5-6) 5 그가 또 “나호르의 아들 라반을 알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그들이 “압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야곱이 다시 “그분은 잘 계십니까?” 하고 묻자, 그들이 “잘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의 딸 라헬이 양 떼를 몰고 오는군요.” 하고 대답하였다. 지금 야곱의 나이가 77세입니다. 그리고 이사악과 레베카가가 야곱을 낳는데, 20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야곱의 어머니 레베카가 고향 하란을 떠난 지 97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외삼촌 라반이 살았는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외삼촌 라반이 평안하냐고 물었습니다. 목자들이 평안하다고 합니다. 목자들이 외삼촌 라반이 평안하다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보세요 지금 저기 라반의 딸 라헬이 라반의 양을 몰고 오네요’ 라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브엘세바에서 한 달을 지도(地圖)도 없이 걸어갔는데, 하란 가까운 동방 사람의 땅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우물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하란에서 온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란에도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어떻게 라반을 알 수 있겠습니까? 또 라반의 이야기를 하는 중에 어떻게 갑자기 저기서 라반의 딸 라헬이 라반의 양떼를 몰고 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분명한 하느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베텔에서 야곱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28,15) 15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야곱은 하란의 목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하여 외삼촌 라반의 딸인 라헬을 만났습니다. 하느님의 택하심을 받은 우리의 삶에는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은 원인을 알 수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룻이 보아즈의 밭에 우연히 들어가서 보아즈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 우연이지만 그 속에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시편80,2) 2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 요셉을 양 떼처럼 이끄시는 분이시여.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분이시여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요셉을 인도하셨던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의 삶을 지금도 인도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을 청소년 시절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도 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미움을 받지 않았다면 애굽으로 팔려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게 감옥으로 간 것도 하느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왜냐하면 감옥으로 가지 않았다면 술 맡은 관원을 만나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술 맡은 시종장에게 배신을 당하고, 2년 동안 요셉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도 하느님의 인도입니다. 왜냐하면 술 맡은 시종장이 감옥에서 나갈 때 요셉의 나이가 28살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애굽의 총리는 30살이 되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2년 뒤 30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내 인생에 이것만은 지우고 싶은 순간들도 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내 인생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도 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내 인생에 그 사람만 없었으면, 그 일만큼은 없었으면 하는 모든 순간들도 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인간적으로 알 수 없는 그 모든 순간들도 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창세29,11) 11 그런 다음 야곱은 라헬에게 입 맞추고 목 놓아 울었다. 왜 여기서 야곱이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웁니까?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임을 알고 감격해서 웁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나의 모든 삶을 요셉과 같이, 야곱과 같이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면 우리의 삶 가운데 예기하지 못했던 일이 닥치더라도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이구나.” 라고 하십시오. 하느님의 택한 백성의 모든 삶이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는다면~ 첫째, 때를 기다리지 말고 현재 나에게 맡긴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모든 삶이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라고 깨닫고 때를 기다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목자들은 양떼들에게 물을 먹이지 않습니다(2절). 그 이유는 아직 모든 양떼들이 모일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8절을 보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답니다. 가축들이 다 모여든 다음에야 우물에서 돌을 굴려 내고 양 떼에게 물을 먹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야곱은 나중에 모든 양떼가 오면 먹이더라도 먼저 온 양떼를 먹이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창세29,10) 10 야곱은 자기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외숙 라반의 양 떼를 보자, 다가가 우물에서 돌을 굴려 내고, 자기 외숙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은 운명론이 아닙니다. 운명론은 내게 정해진 운명이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조건 때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삶이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조건 때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결혼에 있어서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먼저 하느님께 기도로 간절하게 구해야합니다. 그리고 결혼 상대를 찾아야합니다. 찾았으면 그 사람이 정말 하느님께서 인도하신 사람인지 그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야합니다. 직장을 구함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먼저 하느님께 간절히 구하고 열심히 찾아야합니다. 그 수십 곳이라도 문을 두드려야합니다. 지금도 하느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막연히 때만 기다리지 말고 야곱과 같이 현재 내 앞에 있는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모든 삶이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고 오늘도 최선을 다하여 살아갑시다. 둘째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는다면 사랑으로 살아야합니다. 14절에 야곱은 이제 라반의 집에서 한 달을 거주합니다. 한 달 있으면서 열심히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15절에서 외삼촌 라반은 “너는 내 생질(甥姪)인데,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16절에 라반에게 두 딸이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레아요 하나의 이름은 라헬입니다. (창세29,17-18) 17 레아의 눈은 생기가 없었지만, 라헬은 몸매도 예쁘고 모습도 아름다웠다. 18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외삼촌의 작은딸 라헬을 얻는 대신 칠 년 동안 외삼촌 일을 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7.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라고 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레아는 외모가 아름답지 못하고, 라헬은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18절에 야곱은 외모가 아름다운 라멜을 더 사랑함으로 라헬과 결혼하기 위하여 7년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신부의 집에 결혼지참금을 내야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돈이 없기 때문에 7년 동안 일을 함으로 결혼지참금을 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19절에 라반이 말하였다. “그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너에게 주는 것이 낫겠다. 그러면 내 집에 머물러라.” 그래서 (창세29,20) 20 야곱은 라헬을 얻으려고 칠 년 동안 일을 하였다. 이것이 그에게는 며칠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가 그만큼 라헬을 사랑하였던 것이다.”고 합니다. 테살로니카 전서에서 ‘사랑의 수고’라는게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는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기에 7년을 며칠같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지금도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모든 일을 사랑함으로 그 일을 기쁨으로 감당합시다. 세째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는다면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야합니다 이제 야곱이 라반에게 약속한 7년의 기한이 찼습니다. 그래서 21절에서 야곱은 라헬을 내 아내로 내게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라반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레아가 야곱에게로 갑니다. 또 레아의 여종 실바도 시녀로 줍니다(24절). 그래서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까 그가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입니다. (창세29,25) 25 그런데 아침에 보니, 레아가 아닌가! 야곱이 라반에게 말하였다.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라헬을 얻는 대신 외삼촌 일을 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저를 속이(라마)셨습니까?” 여기서 속이다라는 단어가 원어로 “라마” 입니다. 이 말은 (창세27,35) 이사악이 말하였다. “네 동생이 와서 나를 속이고 네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구나.”고 하는데, 여기서 속인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의 삶을 인도하셨는데, 왜 외삼촌인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는 일을 격게 하십니까? 그것은 야곱이 아버지 이사악을 속인 일을 돌아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앞으로 하느님께서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10번이나 속임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것도 과거에 아버지와 형을 속였던 야곱을 돌아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데, 왜 우리 앞에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두시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앞에 교만한 사람을 두신 이유도 하느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교만했던가를 돌아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날마다 더 다듬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창세기29장에서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31절에서 35절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한 사람을 더 사랑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29,31) 31 주님께서는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다. 그러나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었다.” 고 합니다. 또 33절에서도 “주님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들으시고, 나에게 이 아들도 주셨구나.” 라고 합니다.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라헬보다 남편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한 레아를 하느님은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에 레아는 하느님께서 내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아들을 주셨다는 뜻에서 첫째 아들 이름을 르우벤이라 했습니다. (창세29,32) 32 레아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러고는 “주님께서 나의 괴로움을 보아주셨구나.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해 주겠지.” 하면서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였다.” 또 하느님께서는 여인으로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그 마음의 고통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창세29,33) 33 그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러고는 “주님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들으시고, 나에게 이 아들도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시메온이라 하였다. 시메온은 사무엘과 같은 말로서 ‘하느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또 34절에 “34 그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내가 이렇게 아들을 셋이나 낳아 주었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에게 매이겠지.”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다.”라고 합니다. 셋째아들을 낳고 레아는 이제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남편과 내가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름을 ‘연합’이라는 뜻에서 ‘레위’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레아는 일편단심으로 남편의 사랑만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을 낳고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겠지, 라고 합니다. 또 셋째아들을 낳고 이제 내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넷째 아들을 낳을 때는 다릅니다. (창세29,35) 35 그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송하리라.”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아기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다. 그러고서는 그의 출산이 멈추었다. 넷째 아들을 낳고는 레아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넷째 아들을 낳고는 ‘내가 이제는 야훼를 찬송히리라.’고 합니다. “이제는” 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 동안은 레아는 남편의 사랑만을 갈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남편의 사랑이 없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족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받지 못하는 나를 사랑하시는 야훼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고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한분만으로 만족한 레아가 창세기 35장 19절에 보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라헬은 아이를 낳다가 길에서 죽습니다. 그런데 창세기49장 31절에 이사악은 레아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묻혔(葬事)고, 이사악과 그의 아내 레베카가 묻힌 막펠라 동굴에 묻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죽을 때 그의 아내 레아가 묻힌 곳에 나도 묻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결국 마지막 죽을 때 야곱은 레아를 더 사랑합니다. 그리고 레아의 후손으로 다윗이 나오고 예수님이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누구를 더 사랑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사람을 더 사랑하십니다. 혹시 내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절대 우울해하거나 낙심하지 맙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만큼 그 사랑의 빈자리를 채워주십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돈이 있든지 없든지,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사회적인 위치가 높든지 낮든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연약한 부분들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남몰래 흘리는 눈물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지금도 돌보고 계십니다. 또 남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고통의 소리를 하느님께서 지금도 듣고 계십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사랑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을 구하며 오직 하느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갑시다. 하느님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을 누구보다 더 사랑하셔서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지금도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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