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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46) 얍복강 이후 변화된 야곱 (창세3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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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5-13 조회수440 추천수2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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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6) 23. 5. 14. 일요일

 

얍복강 이후 변화된 야곱

 

(창세33,1-20)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사우가 장정 사백 명과 함께 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아이들을 나누어 맡긴 다음, 2 두 여종과 그들의 아이들을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의 아이들을 그 뒤에, 그리고 라헬과 요셉을 맨 뒤에 세웠다. 3 야곱 자신은 그들보다 앞장서 가면서, 형에게 다가갈 때까지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였다.

4 그러자 에사우가 야곱에게 달려와서 그를 껴안았다. 에사우는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추었다. 그들은 함께 울었다. 5 에사우가 눈을 들어 여자들과 아이들을 바라보며, “네 곁에 있는 이 사람들은 누구냐?” 하고 묻자, 야곱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 종에게 은혜로이 주신 아이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러자 두 여종과 그들의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 큰절을 하였다. 7 레아와 그의 아이들도 앞으로 나와 큰절을 하고, 마지막으로 요셉과 라헬이 앞으로 나와 큰절을 하였다.

8 에사우가 물었다. “내가 오다가 만난 그 무리는 모두 무엇하려는 것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주인께서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셨으면 해서 준비한 것입니다.” 9 에사우가 내 아우야, 나에게도 많다. 네 것은 네가 가져라.” 하고 말하였지만, 10 야곱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이 선물을 제 손에서 받아 주십시오. 정녕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주인의 얼굴을 뵙게 되었고, 주인께서는 저를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 11 제발 주인께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저는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이렇게 야곱이 간곡히 권하자 에사우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12 에사우가 말하였다. “, 일어나 가자. 내가 앞장서마.” 13 그러자 야곱이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약하고, 저는 또 새끼 딸린 양들과 소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하루만 몰아쳐도 짐승들이 모두 죽습니다. 14 그러니 주인께서는 이 종보다 앞서서 떠나시기 바랍니다. 저는 세이르에 계시는 주인께 다다를 때까지, 앞에 가는 가축 떼의 걸음에 맞추고 아이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나아가겠습니다.” 15 에사우가 나와 동행한 사람들 가운데 몇을 너에게 남겨 주어야 하겠구나.”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인께서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기만 하면 저는 충분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그날로 에사우는 길을 떠나 세이르로 돌아가고, 17 야곱은 수콧으로 가서 자기가 살 집을 짓고 가축들을 위한 초막들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수콧이라 하였다.

18 야곱은 파딴 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에 있는 스켐 성읍에 무사히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천막을 쳤다. 19 그리고 자기가 천막을 친 땅을 스켐의 아버지 하모르의 아들들에게서 돈 백 닢을 주고 샀다. 20 그는 그곳에 제단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다.

 

오늘 본문에 보면 드디어 야곱과 에사우가 화해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사우와 야곱이 화해를 하는데 2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20년의 시간이 흘러서 에사우와 야곱이 화해를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사우와 야곱이 화해를 하게 된 것은 앞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얍복강 사건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얍복강에서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하기 전에 이미 창세기 329-11절에서 야곱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야곱이 가나안땅에 가면 하느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32,10) 그리고 그 동안도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32,11). 그런데 에사우가 자신과 처자(妻子)를 치려고 하는 상황에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내 형 에사우의 손에서 나를 건져달라고 야곱은 기도했습니다(32,12). 그래서 하느님께서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창세32,13) 13 당신께서는 내가 너에게 잘해 주고, 네 후손을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처럼 만들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베푸신 은혜는 야곱의 옛 자아(自我)가 죽는 은혜였습니다.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한 야곱에게 하느님께서는 육신적으로는 절름발이가 되고 영적으로는 야곱의 옛 자아가 완전히 죽게 하셔서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습니다.

야곱에게 임한 하느님의 은혜는 야곱의 환도 뼈 힘줄을 꺾으시는 하느님의 은혜요, 야곱의 옛 자아를 죽이시는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얍복강 사건은 신약시대로 말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얍복강 사건은 야곱이 의지했던 힘의 근원이 끊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무조건 남을 이기고 높이 되려고 하는 옛 자아가 죽는 사건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十字架)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단순히 공짜 구원을 얻는 티켓이 아닙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머리로만 주님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의 실재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면 과연 십자가와 함께 죽었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우리들 삶 가운데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십자가가 없는 기도는 자기 고집일 뿐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성경공부는 자기 신념일 뿐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예배(미사)는 단순한 종교행사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 십자가가 없는 삶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도 야곱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 육신의 옛 자아가 완전히 죽여서 십자가 이후에 우리의 삶이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창세33,1)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사우가 장정 사백 명과 함께 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아이들을 나누어 맡긴 다음,

 

야곱이 밤새워 하느님과 씨름했지만 여전히 에사우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들은 야곱을 환영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 오고 있습니다.

 

(창세33,2) 2 두 여종과 그들의 아이들을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의 아이들을 그 뒤에, 그리고 라헬과 요셉을 맨 뒤에 세웠다.

 

여기서 야곱이 누구를 더 사랑하는 가를 볼 수 있습니다. 여종과 그 자식들보다는 레아와 그 자식들을 더 사랑하고, 또 레아와 그 자신들보다는 라헬과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앞에 여종과 그 자식들을, 또 그 뒤에 레아와 그 자식들을, 그리고 마지막 라헬과 그 자식들을 두고 있습니다.

 

(창세33,3) 3 야곱 자신은 그들보다 앞장서 가면서, 형에게 다가갈 때까지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였다.

 

창세기32장에 보면 야곱은 가족들이 먼저 얍복강을 건너게 했습니다(창세32,22-24). 그리고 야곱만 맨 뒤에서 얍복강에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합니까? 모든 가족들보다 앞에서 나갑니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야곱은 그동안 모든 사람들을 자신을 위한 도구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에사우에게 죽더라도 자신만 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에사우에게 죽더라도 맨 앞에서 나갑니다. 그리고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힙니다. 여기서 완전히 변화된 야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야곱이 에사우의 장자권을 뺏으려 했던 이유는 에사우보다 더 높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그냥 머리를 숙이는 정도가 아닙니다. 몸을 땅에 굽힙니다. 이것은 온 몸을 땅에 완전히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이 아니라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힙니다. 이것은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은 에사우에게 주인(아도니)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이것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느님에게 배운 대로 나는 당신에게 졌습니다.”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이 몸을 땅에 완전히 굽혔다는 것은 나는 이제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엎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힘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만 살아가겠다.” 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계속해서 은혜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33,5) 5 에사우가 눈을 들어 여자들과 아이들을 바라보며, “네 곁에 있는 이 사람들은 누구냐?” 하고 묻자, 야곱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 종에게 은혜로이 주신 아이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야곱은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오직 하느님이 은혜로 내게 주신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창세33,11) 11 제발 주인께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저는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야곱은 그동안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더 가지고 높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셨기에 내 소유에 만족하다고 합니다. 사람은 절대 자신의 소유로 만족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가 임하면 내 소유로 만족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진정한 만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몸을 완전히 엎드린 야곱은 에사우에게 완전히 몸을 굽힐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겸손(謙遜)입니다.

필리피서에 보면 겸손은 남을 나보다 높게 여기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야곱은 남을 나보다 낮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은 형 에사우 앞에서 자신을 낮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겸손(謙遜)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무조건 고개를 숙인다고 해서 겸손이 아닙니다. 만일 사람만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이고, 몸을 땅에 엎드린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굴종(屈從)일 수 있습니다. 겸손은 비겁한 굴종이 아닙니다. 겸손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사야5장까지 이사야는 유다백성의 죄악에 대하여 심판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랄하게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6장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사6,5) 5 나는 말하였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마찬가지로 지금 야곱은 전날 밤에 하느님을 만난 여운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나니까 내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 앞에서도 몸을 굽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몸을 땅에 일곱 번씩이나 굽히고 엎드린 야곱을 보고 에사우가~

 

(창세33,4) 4 그러자 에사우가 야곱에게 달려와서 그를 껴안았다. 에사우는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추었다. 그들은 함께 울었다.

 

야곱의 목을 치기 위해서 온 에사우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하여 안고 목을 끌어안고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웁니다.

1절에서 분명 에사우는 야곱을 죽이기 위해서 장정 사백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습니다. 이랬던 에사우가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엎드린 야곱의 모습, 또 형 앞에 완전히 엎드린 야곱의 모습 때문입니다. 무조건 이기려는 야곱에서 져 주는 야곱의 모습 때문입니다.

이것도 있지만 이렇게 에사우가 변하게 된 이유는 하느님의 은혜(恩惠) 때문입니다. 앞에서 야곱이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하느님, 저를 가나안땅에 가게 하느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하느님께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내게 은혜를 주셔서 에사우 손에서 건져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환도뼈 힘줄이 끊어지는 은혜,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옛 자아가 죽어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또한 에사우는 동생 야곱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별이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느님께 한 방 맞아서 다리를 절뚝거리는 야곱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에사우는 내 동생 야곱아, 네가 내 장자권을 빼앗아가고 내 축복까지 빼앗아 갔을 때 나는 정말 분노했다. 그리고 20년 동안 이를 갈았다. 그래서 너를 만나면 죽이려고 장정 400명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내 동생 야곱아 네 모습이 왜 그러니, 너 왜 그렇게 다리를 저니, 너 집을 떠날 때는 그렇게 건강했는데 왜 이렇게 약하게 되었니, 네 얼굴이 왜 그렇니, 어제 밤에 또 누구와 싸웠구나, 사랑하는 내 동생 야곱아 이제 너나 나나 나이가 99세나 되었구나, 우리 모두 다 늙어가는구나, 불쌍한 내 동생아!” 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열왕기상8장에 보면 성전에서 솔로몬의 기도가 나옵니다.

 

(1열왕8,50) 50 “당신을 거역하여 지은 모든 반역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사로잡아 간 자들 앞에서도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저들이 그들을 가엾이 여기게 해 주십시오.”

 

이스라엘백성들이 어떻게 바벨론포로에서 해방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들이 이스라엘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야곱의 환도뼈 힘줄이 끊어지지 않아서 야곱이 건장한 모습으로 왔다면 이렇게 하였겠습니까? 또 야곱이 그동안 했던 것처럼 형을 이기려고 했다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에사우가 야곱을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 은혜입니다. 또 불쌍히 여기는 것이 은혜입니다.

 

(창세33,10) 10 야곱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이 선물을 제 손에서 받아 주십시오. 정녕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주인(에사우)의 얼굴을 뵙게 되었고, 주인께서는 저를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

 

지금 야곱은 브니엘에서 본 하느님의 얼굴을 에사우에게서 보았습니다. 브니엘에서 본 하느님의 얼굴은 야곱을 죽일 수 있지만 그를 불쌍히 여겨준 얼굴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에사우의 얼굴은 하느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절둑거리는 야곱을 불쌍히 여겨주는 얼굴이었습니다.

20년간 헤어졌던 에사우와 야곱이 어떻게 서로 화해할 수 있었습니까? 9절에 보면 에사우도 육신적으로 넉넉해서 야곱에 준 예물이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준 예물이 에사우의 마음을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오늘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혜 때문에 야곱은 엎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 때문에 에사우는 야곱을 불쌍히 여길 수 있었습니다. 은혜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혜에는 어떤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조건이 있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은혜란 위로부터 내리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에게서 나오는 사랑이 아닙니다. 위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마음에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은혜의 힘입니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은혜(은총)가 필요합니다. 또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엎드릴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또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히 엎드릴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에사우는 야곱에게 우리가 같이 세일로 가자라고 합니다. 그때 야곱은 우리 자녀들이 어리기 때문에 당장 따라가기 어렵다고 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한 이유는 지금 에사우가 있는 곳은 가나안땅을 떠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이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하느님의 말씀대로 가나안땅에 속해 있는 세겜으로 갑니다. 세겜에서 하느님께 제단을 쌓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창세기127절에서 가나안땅에 가서 제일 먼저 세겜에서 하느님께 제단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세겜에서 하느님께 제단을 쌓고 베텔로 갔다가 헤브론으로 갑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은 아브라함처럼 세겜으로 갔다가 베텔로 갔다가 나중에 헤브론에서 묻힙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하느님께 제단을 쌓고 그곳의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20).

이 말은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나는 이제 오직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을 섬기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수아24,15) 15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했다면 하느님 이제 저는 내 욕망대로 살아가지 않겠습니다. 내 뜻대로 살아가지 않겠습니다. 내게 아무 것이 없어도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 섬기며 살아가겠습니다.하고,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느님의 은혜가 흘러넘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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