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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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5-14 | 조회수557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어제 참 오랜만에 종신봉헌자 10차 연례피정지도차 제 영혼의 고향집같은 왜관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2014년 요셉수도원이 자치수도원이 된 후, 아마 두 번째 방문일 것입니다. 동대구역까지 갔다가 무궁화호를 타고 왜관수도원에 도착했습니다. 무궁화호를 타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믿음의 삶도 이런 것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궁화호처럼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불끈들어 즉시 그 느낌을 적었습니다.
“무궁화호가 좋다 ktx가 아닌 무궁화호 기차가 좋다 무궁화호처럼 살고 싶다
‘부산-서울’ 멀기도 하다 ktx와 비교할 일이 아니다 ‘무궁화호’대로 살면 되지 않겠나
속도도 모양도 아랑곳 없이 넉넉한 공간에 느린 속도 자기 페이스대로 여유있게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끝까지 달리는 편안하고 넉넉한 무궁화호가 좋다 빨리가서 무엇할 건가
음미하며 바라보며 누리는 순간순간이 행복인 것을 무궁화호가 좋다, 무궁화호처럼 살고 싶다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그대로 믿음의 삶을 상징합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내 페이스대로 하느님 불러 주신 늘 거기 정주의 제자리에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왜관 수도원에서 저녁기도 성무일도 시간에 만난 선배, 동료, 후배 수사님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정말 믿음으로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우리 수사님들 모습이 한없이 든든해 보였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도자의 삶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저절로 답이 나옵니다. 셋으로 나눠 묵상했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필리포스와 예루살렘의 베드로와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사마리아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믿음의 제자, 믿음의 전사 필리포스입니다. 그리스도의 선포, 바로 믿음의 선포입니다. 들어야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독점물이 아니라 나눠야 합니다. 믿음의 기적이요 이런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경청합니다. 말씀을 경청하며 믿음을 보고 듣고 배우는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믿음의 기적, 믿음의 치유, 믿음의 신바람, 믿음의 기쁨입니다. 새삼 믿음이 답임을 깨닫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약해도 교회공동체의 믿음은 강합니다. 공동체에 뿌리둔 믿음일 때, 성장하는 튼튼한 믿음입니다. 예루살렘 사도공동체는 믿음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하여 필리포스를 지원합니다. 파견된 베드로와 요한은 이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고 이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을 받습니다.
믿음도 나눠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안수하자 이들은 성령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강복의 안수를 참 좋아합니다. 고백성사후는 물론 참으로 뭔가 주고 싶은데 줄것이 없으면, 진짜 가장 좋은 강복을 드리곤 합니다. 말그대로 믿음으로 드리는 믿음의 강복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이 형제(자매)에게 축복을 내리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둘째, 희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에 이러 ‘희망으로’입니다. 어제 피정 두 번째 강의 주제도 희망의 여정, 희망의 순례자로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희망이, 꿈이, 비전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희망의 힘이요 희망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희망 역시 주님의 선물이자 우리의 선택입니다, 역시 희망의 선택, 희망의 훈련, 희망의 습관화입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제 말이 아니라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 생생한 희망을 두고 희망으로 살아갈 때 바른 양심, 온유하고 겸손한 삶, 선한 처신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희망을 두는 분은 이런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받는 참 좋은 희망의 선물이 영으로 다시 생명을 받아 생명 충만한 영적 삶을 살게 합니다.
셋째,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의 규칙에서 강조하는 바,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여기에 바탕하여 어제 흥겹게 노래한 저녁성무일도 마리아 후렴이 생각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와함께 머무를 것이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보호자 성령입니다. 예수님의 자상한 설명이 고맙고 힘이 납니다. 바로 보호자 성령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모르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히시는 보호자 성령, 사랑의 성령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영혼의 영혼이 성령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우리에게는 결정적 도움이, 힘이 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주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본질적이요 중요한지 새삼 깨닫습니다. 사랑의 계명을 지킬 때 하느님 아버지도, 그리스도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주님은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을 통해 입증되는 주님 사랑이요 바로 이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믿음으로 시작하여 희망으로 살다가 사랑으로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 희망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살아갈수록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믿음, 주님과의 희망, 주님과의 사랑이면 소원이겠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의 주님께 대한 신망애(信望愛)의 관계를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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