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47) 신앙의 위기(危機)는 평안(平安)이다. (창세34,30-35,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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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5-15 | 조회수38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47) 23. 5. 15. 월 신앙의 위기(危機)는 평안(平安)이다. (창세34,30-31. 35,1-15) 30 그러자 야곱이 시메온과 레위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이 땅에 사는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에게 나를 흉측한 인간으로 만들어, 나를 불행에 빠뜨리는구나. 나에게는 사람들이 얼마 없는데, 그들이 합세하여 나를 치면, 나도 내 집안도 몰살당할 수밖에 없다.” 31 그러나 그들은 “우리 누이가 창녀처럼 다루어져도 좋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베텔로 올라가 그곳에서 살아라. 그곳에 제단을 만들어, 네가 너의 형 에사우를 피해 달아날 때 너에게 나타난 그 하느님에게 바쳐라.” 2 야곱은 가족들과 자기에게 딸린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너희에게 있는 낯선 신들을 내버려라.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3 일어나 베텔로 올라가자. 그곳에 제단을 만들어,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나에게 응답해 주시고 내가 어디를 가든 나와 함께 계셔 주신 하느님께 바치고자 한다.” 4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낯선 신들과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들을 내놓았다. 야곱은 스켐 근처에 있는 향엽나무 밑에 그것들을 묻어 버렸다. 5 그들이 길을 가는 동안 하느님께서 내리신 공포가 그들 주위의 성읍들을 휘감아, 아무도 야곱의 아들들을 뒤쫓지 못하였다. 6 야곱은 자기에게 딸린 모든 사람과 함께 가나안 땅에 있는 루즈 곧 베텔에 다다랐다. 7 야곱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곳의 이름을 엘 베텔이라 하였다. 그가 자기 형을 피해 달아날 때,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로 그곳에서 그에게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이다. 8 그때 레베카의 유모 드보라가 죽어, 베텔 아래에 있는 참나무 밑에 묻혔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알론 바쿳이라 하였다. 9 야곱이 파딴 아람에서 돌아오자, 하느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 복을 내려 주셨다. 10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이름은 야곱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야곱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제 너의 이름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셨다. 11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너에게서 한 민족이, 아니 민족들의 무리가 생겨날 것이다. 네 몸에서 임금들이 나올 것이다.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준 땅을 너에게 준다. 또한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도 그 땅을 주겠다.” 13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는 야곱과 말씀을 나누시던 그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셨다. 14 야곱은 하느님께서 자기와 말씀을 나누신 곳에 기념 기둥, 곧 돌로 된 기념 기둥을 세운 다음, 그 위에 제주를 따르고 또 기름을 부었다. 15 야곱은 하느님께서 자기와 말씀을 나누신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하였다. 신앙의 위기는 고난(苦難)입니까? 아니면 평안(平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이 신앙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극심한 환난가운데서 신앙의 위기를 맞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 신앙의 가장 큰 위기는 고난(苦難)이 아니라 평안(平安)입니다. 다윗도 고난가운데서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궁에 평안히 거(居)하게 된 때에 밧쎄바를 범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면 더 감사하게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내 삶이 더 평안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고난보다는 평안의 때에 하느님을 잃어버리기기 더 쉽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야곱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33장에서 야곱은 20년 동안 힘들었던 에사우와의 관계가 풀렸습니다. 20년 동안 야곱의 마음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로 에사우의 마음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에사우는 야곱에게 같이 에돔 땅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정중히 거절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33,18) 18 야곱은 파딴 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에 있는 스켐 성읍에 무사히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천막을 쳤다.
에사우와의 문제가 풀리자 이제 야곱은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릅니다. “무사히” 라는 말은 “샬렘”이라는 말로서 외부에서 위협하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이 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라고 했을 때도 평안의 도시라는 말로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외부의 위협이 없는 평안의 도시를 꿈꾸었습니다. 이제 야곱의 삶에 평안이 왔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가나안 땅 스켐 성읍에 천막을 칩니다. 이렇게 야곱이 스켐 성읍에서 천막을 친 것까지는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창세33,19) 19 그리고 자기가 천막을 친 땅을 스켐의 아버지 하모르의 아들들에게서 돈 백 닢을 주고 샀다. 야곱은 천막을 친 밭을 스켐 사람들에게 백 닢(크시타)에 삽니다. 야곱은 이제 여기서 계속해서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특별히 스켐은 당시에 상업의 요충지였습니다. 또 물이 풍부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켐에 살면 육신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이 풍요롭게 더 잘 살줄 알았습니다. 또 스켐에 살면 자녀들도 더 좋은 환경에서 잘 자랄 줄 알았습니다. 이 스켐은 요즘으로 말하면 강남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부요하고 자녀를 교육하기에도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한 가지 잊어버린 것이 하느님께서는 야곱이 형 에사우를 피하여 도망갈 때 베텔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다시 가나안땅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으로 갈 때가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야곱도 하느님께 서원한 것이 있습니다. (창세28,20-21) 20 그런 다음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21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여기서 야곱은 하느님께서 나를 지켜주셔서 가나안땅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이제는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으로 섬기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리고~ (창세28,22) 22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평안을 주시면 야곱은 다시 베텔로 돌아와서 베텔에서 기둥으로 세운 이 돌로 하느님을 예배하는 하느님의 집으로 삼을 것과 또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 즉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베텔로 가지 않고 스켐에서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계속해서 거주합니다. 또 거기에 거주하면서 하느님께서 평안을 주셔도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어려울 때 하느님께 “하느님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내게 평안을 주시면 저는 절대 주일미사예배를 빼먹지 않고 반드시 하느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또 하느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면 내가 감사헌금도 내겠습니다.” 고 서원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께서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평안을 주시면 하느님께 했던 모든 서원들은 다 잊어버립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평안을 주니까 베텔에서 하느님께 했던 모든 서원들을 다 잊어버립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평안을 주실 때 야곱이 베텔에서 하느님께 한 서원조차 잊어버리고 세겜에서 완전히 정착하여 살려할 때, 창세기34장에 보면 야곱의 유일한 딸인 디나가 스켐 성읍에 갔다가 스켐에게 강간(强姦)을 당합니다. 그래서 스켐은 야곱의 딸 디나를 아내로 맞으려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 동생을 줄 수 없다고 하고 스켐의 모든 남자들로 할례(割禮)를 받게 합니다. 할례를 받으면 3일째가 제일 어려운데 그 3일째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서 같은 배에서 난 디나의 오빠인 시메온과 레위가 스켐의 남자들을 다 죽입니다. 그리고 스켐 성읍의 모든 재산을 약탈하고, 여인들을 노비로 잡아옵니다. (창세34,30) 30 그러자 야곱이 시메온과 레위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이 땅에 사는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에게 나를 흉측한 인간으로 만들어, 나를 불행에 빠뜨리는구나. 나에게는 사람들이 얼마 없는데, 그들이 합세하여 나를 치면, 나도 내 집안도 몰살당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요즘에도 이스라엘이 중동의 국가를 치면 다른 중동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치는 것처럼 얼마든지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은 이 일로 가나안족들에게 완전히 멸망을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창세기34장을 보면 하느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디나가 스켐 여인들을 보러 갔을 때 하느님께 물어보았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리고 디나가 스켐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했을 때도 하느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창세기33장에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4장에서는 여전히 야곱이라고 불립니다. 왜 야곱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20년 동안 그를 괴롭혔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하느님께 간절하게 기도할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이 평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년 동안 하느님이 없는 평안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최대의 위기(危機)는 고난(苦難)이 아니라 평안(平安)입니다. 육신적으로 아무 어려움이 잘 될 때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악취(惡臭)를 나타내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자녀를 망치는 제일 큰 지름길은 우리 자녀들이 무조건 세상에서 잘 되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보다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서 성공만하면 된다. 무조건 육신적으로 잘 살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녀를 망치는 제일 빠른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창세35,1) 1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베텔로 올라가 그곳에서 살아라. 그곳에 제단을 만들어, 네가 너의 형 에사우를 피해 달아날 때 너에게 나타난 그 하느님에게 바쳐라.” 여기 보면 주어(主語)는 야곱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야곱이 나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의 잘못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없어질 위기에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고난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고난은 신앙의 위기가 아니라 기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완벽한 평안을 주지 않으심은 고난가운데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겨두신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느님은 말씀을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먼저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말은 “쿰”이라는 말로서 단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낙담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포자기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달리다쿰”이라고 하셨습니다.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일어나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사용되었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부활의 능력으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무엇보다 죽음의 자리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나서 베텔로 올라가라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베텔에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있는 곳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는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텔로 올라가라고 하신 것은 그 곳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타내는 사다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34장에 보면 야곱과 그 자녀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은 딸이 스켐에게 강간을 당하였을 때 스켐 사람들이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딸 디나도 세겜에게 여성으로서 말로 할 수 없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또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스켐의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 어디를 보더라도 도무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는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있음은 오직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았을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또 우리도 감히 하느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다리로 날마다 하느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절망과 고통, 우울과 낙심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그 베텔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날마다 경험하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창세35,2) 2 야곱은 가족들과 자기에게 딸린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너희에게 있는 낯선 신들을 내버려라.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에 대한 반응해야합니다. 또 나를 사랑하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반응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에 “아멘”으로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반응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난을 다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삼읍시다. 또 이제 야곱은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와 함께 우리가 베텔로 올라가자고 합니다. 또 그들에게 “모든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기를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고 베텔로 올라가자” 라고 합니다. 베텔로 올라가는 것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닙니다. 단순히 성당에 오는 것만이 베텔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곳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집이 되고 이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진정한 회개(悔改)가 필요합니다. 회개란 ‘내 삶 가운데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우상을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죄로 물든 나를 십자가의 피로 정결하게 씻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옛 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새 사람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삶의 모든 우상(偶像)을 버리고, 죄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느님의 집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창세35,3) 3 일어나 베텔로 올라가자. 그곳에 제단을 만들어,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나에게 응답해 주시고 내가 어디를 가든 나와 함께 계셔 주신 하느님께 바치고자 한다.” 그동안 하느님은 야곱의 환난 때마다 그에게 찾아오셔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오는 길에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앞으로 내 환난 날에 반드시 내게 응답하시고, 앞으로 내가 가는 모든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실 하느님께 제단을 쌓으려 합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평안의 때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느님은 환난의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응답하십니다. (시편51,16) 16 죽음의 형벌에서 저를 구하소서, 하느님, 제 구원의 하느님. 제 혀가 당신의 의로움에 환호하오리다. 환난(患難 죽음의 형벌)이란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 아무도 그를 도울 자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겠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하느님을 생각한다, 묵상한다, 바라보기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환난 날에 우리가 하느님을 간절히 찾아야합니다. 평상시에는 우리가 혹 적당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할 때는 더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불안과 근심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 가운데 불안할 수 있습니다. 또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안과 두려움은 괜찮습니다. 불안하니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두려우니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침체는 환난가운데 두려움도 느끼지 않고, 불안도 느끼지 않기에 전혀 기도할 기력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염려와 환난이 깊은 만큼 우리는 더 간절히 더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환난 때는 소리를 내지 않아도 간절히 하느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어떨 때는 정말 큰 소리로 소리를 내어서 기도해야할 때도 있습니다. 환난 때의 기도는 단순히 의식적이고 형식적인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환난 때의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또 단순히 기도회시간에 나와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길을 가다가도, 세수를 하다가도, 하루 종일 내 마음속에 하느님께 대하여 울부짖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하느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심령에 평안을 주십니다. 평안은 신앙의 위기(危機)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신앙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환난을 하느님을 만날 있는 기회로 삼읍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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