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50) 요셉의 꿈에 대한 세 가지 오해(誤解) (창세37,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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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5-18 | 조회수49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창세기(50) 23. 5. 18. 목 요셉의 꿈에 대한 세 가지 오해(誤解) (창세37,1-11) 1 야곱은 자기 아버지가 나그네살이하던 땅 곧 가나안 땅에 자리를 잡았다. 2 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 열일곱 살 난 요셉은 형들과 함께 양을 치는 목자였는데, 아버지의 아내인 빌하의 아들들과 질파의 아들들을 도와주는 심부름꾼이었다. 요셉은 그들에 대한 나쁜 이야기들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 3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4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5 한번은 요셉이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때문에 형들은 그를 더 미워하게 되었다. 6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꾼 이 꿈 이야기를 들어 보셔요. 7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 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 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 8 그러자 형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우리의 임금이라도 될 셈이냐? 네가 우리를 다스리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그리하여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9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 10 이렇게 그가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야기하자,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어 말하였다. “네가 꾸었다는 그 꿈이 대체 무엇이냐? 그래,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너에게 나아가 땅에 엎드려 큰절을 해야 한단 말이냐?” 11 형들은 그를 시기하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2002년도에 우리나라에 월드컵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가 4강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은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꿈은 이루어진다.”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물론 그때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온 국민들이 그 꿈 때문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셉이 꿈을 꾼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37,6-7) 6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꾼 이 꿈 이야기를 들어 보셔요. 7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 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 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 또 요셉이 두 번째 꿈을 꿉니다. (창세37,9) 9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 19절에 보면 형들은 요셉에 대해서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이라고 하면 먼저 요셉의 꿈이 먼저 떠오릅니다. 또 요셉의 형제들도 요셉을 꿈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셉의 꿈이라고 했을 때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셉의 꿈에 대한 ①첫 번 째 오해는 요셉의 꿈이 요셉이 꾼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매일 자신이 형들보다 더 높이 되어서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고, 또 심지어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에게 절을 할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꿈이 꿈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꿈은 인간이 꾸는 꿈이 아닙니다. 또 인간이 꾸고자 해서 꾸는 꿈도 아닙니다. 성경(聖經)에서 꿈은 하느님께서 꾸게 하신 꿈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꿈은 절대 요셉의 꿈이 아닙니다. 요셉의 꿈은 요셉에게 대한 하느님의 꿈입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꾸게 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기쁘신 뜻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필리2,13)13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아무 생각이 없이 계시지 않고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기쁘신 뜻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기쁘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지금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물과 사람의 차이에서 동물은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또 왜 내가 여기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절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아무 의미 없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느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살아계셔서 하느님의 기쁘신 뜻을 지금도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요셉에 꿈에 대한 ②두 번째 오해는 요셉의 꿈은 무조건 세상에서 높이 되는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당시 최대의 강대국인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모든 형제들보다 더 뛰어나게 되는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요셉의 꿈에 대한 형제들의 오해이기도 했습니다. (창세37,8) 8 그러자 형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우리의 임금이라도 될 셈이냐? 네가 우리를 다스리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그리하여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한때 그리스도교계에서 고지론(高地論)과 미답지론(未踏地論)이 서로 논쟁이 된 적이 있습니다. 고지론이란 전투를 할 때 먼저 고지를 점령해야 전투를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 즉 고지에 올라가야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 고지론의 장점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삶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이 고지론의 문제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들 중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 신앙생활의 목표가 그런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은 그런 높은 자리를 바라보고 그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평생을 패배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아니면 죽을 때까지 그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는 허황된 꿈만 꾸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높은 위치에 올라가야만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인 대통령시절에 우리나라가 그리스도교국가가 되었어야하지 않습니까? 또 국회의원 중에서 3분의 일 이상이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정치가 그리스도교적으로 다 바뀌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을 보았을 때, 그리스도교인들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를 점령해야 세상에 그리스도교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무리가 있습니다. 또 이런 높은 자리만을 강조할 때 사람들은 낮은 곳 섬기는 곳으로는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미답지론(未踏地論)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단순히 높은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이 인도하신다면 세상 사람들이 밟지 않은 곳(未踏地)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실 고지론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도 이런 고지론의 입장에서 볼 때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요셉의 꿈입니다. 고지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요셉의 꿈은 애굽의 제2인자인 총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애굽의 총리가 되는 꿈을 꾸면서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녀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좀 더 면밀하게 요셉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면, 요셉이 꿈을 꾸었을 때 과연 그 꿈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꿈을 꿀 때 내가 앞으로 13년 뒤에는 애굽의 총리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느냐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꿈이란 그 꿈을 보여주시는 하느님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꿈을 꾸는 요셉은 몰랐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기 직전까지도 애굽의 총리가 되는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이 그 꿈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분명 내게 대한 하느님의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꿈은 요셉이 단순히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삶 속에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즉 하느님의 꿈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평생 꿈꾸었던 것은 애굽의 총리가 아니라, (어떤 위치가 있건) 내 삶 속에서 나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 요셉의 꿈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 (만일 요셉이 단순히 애굽의 총리가 되는 꿈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찬스가 왔습니다. 그것은 보디발의 아내의 청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 총리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면 당연히 그 청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아내에게 인정을 받고, 나중에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시위대장 보디발에게도 인정을 받아, 정계(政界)에 들어가서,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될 기회를 엿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관심을 가진 것은 애굽의 총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보디발 아내 앞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죄를 지어요.” 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록 내가 사람 앞에 서 있지만 나는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생애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세상적인 성공이나 높은 자리가 아닙니다. 쾌락이나 재미가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입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비록 내가 억울하게 감옥에 가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떳떳하게 사는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억울하게 감옥에 간 요셉이 실패한 인생이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지 않았어도, 죄수의 신분이었어도, 그는 성공한 삶이었습니다. 비굴하게 사는 것보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죄수로 사는 삶이 낫기 때문입니다 또 요셉의 꿈이 단순히 애굽의 총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감옥에서 요셉의 삶입니다. 만일 요셉의 꿈이 총리가 되는 것이었다면 그는 총리가 아닌 죄수가 되었을 때, 실패와 좌절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과연 이럴 수 있습니까? 왜 내가 죄수가 되어야합니까? 내가 가야할 곳은 저 높은 곳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죄수들이 있는 감옥에 있어야합니까?” 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감옥에 있건 어디에 있건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그것으로 요셉은 충분했습니다. 요셉은 처음부터 애굽의 총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옥에서도 하느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총리가 되지 못할 상실감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감옥 속이라도 하느님이 그와 함께 하시니 감옥 속에서의 죄수의 삶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헌작(獻爵)시종장을 만났고, 그의 꿈을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요즘 경제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직장에. 또는 그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청년들에게 이런 고지만을 강요합니다. 적어도 이런 직장에, 이런 학교에, 이런 고지에 올라가야 성공이며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나타나는 현상은 ‘적어도 나는 이런 자리에는 올라가야하는데, 이런 직장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정도의 위치는 되어야하는데, 지금 내가 그것에 못 올라가니 나는 실패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사회는 고지를 점령하는 소수를 위해 다수가 패배주의 열등감에 빠지게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위치에 있건 하느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어떤 고지에 올라가는 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입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그곳에 올라가 있지 않으면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까? 또 내 삶에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든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그것이 성공한 삶이고, 의미(意味)있는 삶인 것입니다. 또 요셉의 꿈은 애굽의 총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난 다음입니다. (창세45,7-8) 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 땅에 일으켜 세우고, 구원받은 이들의 큰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8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파라오의 아버지로, 그의 온 집안의 주인으로, 그리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여기서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을 이리로 보낸 것은 “당신들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가나안땅에 흉년이 들것을 미리 아시고 하느님의 백성들이 다 죽게 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하느님의 백성들을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난 다음에도 (단순히 총리자체가 아니라) 총리가 되게 하신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총리가 되고 난 다음에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내 인생이 바닥을 살더라도 꿈을 꾸어야합니다. 이것은 높은 곳을 향한 꿈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위한 꿈이 아닙니다. 우리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가는 꿈입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님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하느님께서 나를 향하신 뜻이 있습니다. 현실이 어렵더라도 하느님이 내게 주신 꿈이 있다면 그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기쁘신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꿈이 있습니다.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인생의 밑바닥에 있더라도 우리를 향하신 그 하느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가기를 바랍니다. ③세 번째 요셉의 꿈에 대한 오해는 우리를 향하신 꿈이란 좋은 환경과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이 있다고 이야기하니까 나는 지금 먹고 살기도 힘이 드는데 무슨 꿈 이야기를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또 지금 우리가 꿈을 꿀 상황이냐, 현실이 이렇게 캄캄한데 무슨 꿈이 있겠느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과 4절에서 요셉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만 색동 옷을 입혔습니다. 그러니까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요셉에게 ‘평안하냐’ 라는 인사말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요셉은 청소년 시절에 완전히 왕따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요셉이 형제들에게 왕따를 당해서 더 이상 인간적인 꿈을 꿀 수 없을 때 하느님은 요셉에게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최악의 상황입니다. 도무지 내가 그 어떤 인간적인 꿈도 꾸지 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을 보여주십니다. 또 하느님은 고난을 통하여 꿈을 이루어가십니다. 만일 꿈이 평안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면 요셉이 꿈을 꾼 이후에 그 어떤 고난도 없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꿈 이야기를 하다가 더욱더 형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이것은 분명 고난입니다. 그런데 만일 요셉에게 이런 고난이 없었으면 요셉은 애굽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또한 요셉은 애굽에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다가 감옥에 갔습니다. 이것도 분명 고난입니다. 그런데 만일 요셉이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그는 술 맡은 관원을 만날 수 없었고 그렇다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고, 이스라엘을 위기가운데 구할 수 없었습니다. (창세37,20) 20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사람들은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덩이와 같은 곳에 던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를 시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은 그 어떤 어려움과 시험과 고난이 있어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꿈은 우리의 꿈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어느 한 순간도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에페1,23) 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교회가 하느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가운데 하느님의 충만하신 것이 충만하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가 이 땅에 축복의 통로가 되어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지금이 가장 어두울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이때가 하느님의 꿈을 꿀 때입니다. 우리에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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