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52) 꿈(夢)과 하느님의 함께 하심 (창세39,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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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5-20 | 조회수31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52) 23. 5. 20. 토 꿈(夢)과 하느님의 함께 하심 (창세39,1-23) 1 요셉은 이집트로 끌려 내려갔다. 파라오의 내신으로 경호대장인 이집트 사람 포티파르가 요셉을 그곳으로 끌고 내려온 이스마엘인들에게서 그를 샀다. 2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으므로, 그는 모든 일을 잘 이루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기 주인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서 살았다. 3 그 주인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며, 그가 하는 일마다 주님께서 그의 손을 통해서 잘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4 그래서 요셉은 주인의 눈에 들어 그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주인은 요셉을 자기 집 관리인으로 세워,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의 손에 맡겼다. 5 주인이 요셉을 자기 집과 모든 재산의 관리인으로 세운 뒤부터, 주님께서는 요셉 때문에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 주님의 복이 집 안에 있는 것이든, 들에 있는 것이든 그의 모든 재산 위에 미쳤다. 6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요셉의 손에 내맡기고, 그가 있는 한 자기가 먹는 음식밖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요셉은 몸매와 모습이 아름다웠다. 7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길을 보내며 “나와 함께 자요!” 하고 말하였다. 8 그러나 요셉은 거절하면서 주인의 아내에게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주인께서는 모든 재산을 제 손에 맡기신 채, 제가 있는 한 집안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으십니다. 9 이 집에서는 그분도 저보다 높지 않으십니다. 마님을 빼고서는 무엇 하나 저에게 금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마님은 주인 어른의 부인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이런 큰 악을 저지르고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10 그 여자는 날마다 요셉에게 졸랐지만, 요셉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곁에 눕지도 그와 함께 있지도 않았다. 11 하루는 그가 일을 보러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하인들이 집 안에 아무도 없었다. 12 그때 그 여자가 요셉의 옷을 붙잡고 “나와 함께 자요!” 하고 말하자, 요셉은 자기 옷을 그의 손에 버려둔 채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13 그 여자는 요셉이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둔 채 밖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고, 14 하인들을 불러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 좀 보아라. 우리를 희롱하라고 주인께서 저 히브리 녀석을 데려다 놓으셨구나. 저자가 나와 함께 자려고 나에게 다가오기에 내가 고함을 질렀지. 15 저자는 내가 목청을 높여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자기 옷을 내 곁에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쳐 나갔다.” 16 그러고는 자기 주인이 집에 돌아올 때까지 그 옷을 제 곁에 놓아두었다가, 17 그에게 같은 말로 이르는 것이었다. “당신이 데려다 놓으신 저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나에게 다가오지 않겠어요? 18 그래서 내가 목청을 높여 소리 질렀더니, 자기 옷을 내 곁에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쳤답니다.” 19 주인은 “당신 종이 나에게 이렇게 했어요.” 하는 아내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20 그래서 요셉의 주인은 그를 잡아 감옥에 처넣었다. 그곳은 임금의 죄수들이 갇혀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그곳 감옥에서 살게 되었다. 21 그러나 주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시면서 그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전옥의 눈에 들게 해 주셨다. 22 전옥은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를 요셉의 손에 맡기고, 그곳에서 하는 모든 일을 요셉이 처리하게 하였다. 23 전옥은 요셉의 손에 맡긴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으며, 그가 하는 일마다 주님께서 잘 이루어 주셨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무슨 꿈이 있겠느냐고 하지 말고 또 나는 지금 환경이 좋지 않기 때문에 무슨 꿈이 있겠느냐고 하지 맙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도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 대한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 나는 구원받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더욱더 분명하게 나에 대한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구원받은 우리에 대한 꿈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요셉의 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요셉의 꿈이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할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 소서, 요셉을 양 떼처럼 이끄시는 분이시여.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분이시여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시편80,2). 여기 보면 요셉을 양 떼같이 인도하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도 인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을 인도하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도 인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은 구약시대 이스라엘만 아니라 신약시대 구원받은 우리를 가리킵니다.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그와 함께 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꿈을 가지고 계시고,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필리2,13) 13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 둘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삶 가운데서 행(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꿈을 가지고 계시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삶 가운데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꿈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궁극적인 하느님의 꿈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로마8,28-30)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22장에서 아브라함은 모리야 산에서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 이사악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가장 귀한 생명을 드린 것과 같습니다. 또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도 이사악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악도 모리야 산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렸습니다. 이것도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가장 귀한 생명을 드린 것과 같습니다. 또 하느님께서 야곱을 부르신 목적도 그것도 야곱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야곱이 태어날 때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야곱을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은 섬기는 자로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창세기37장에서 야곱의 족보를 이야기를 하면서 요셉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왜 요셉이 계속해서 낮아지고 낮아져서 감옥에 까지 가고 그리고 감옥에서도 섬기는 자가 되게 하는 줄 아십니까? 그것도 하느님께서 요셉으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신 것도 높은 곳에서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야곱은 마지막 죽을 때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신 목적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들 가운데 형 므나쎄에게 작은 축복을 주고, 아우 에프라임에게 큰 축복을 주었습니다.(창세48장)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궁극적인 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네 꿈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대부분 우리가 무엇이 되느냐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꿈은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하느님 내가 A라는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까? B라는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뜻은 A라는 직장에 들어가든, B라는 직장에 들어가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 어디에 들어가더라도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낸다면 그것이 하느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청소부가 되어도 그곳에서 예수님의 섬기시는 모습을 나타낸다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장이 되어도 예수님의 형상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서면 우리 인생이 무엇으로 평가를 받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 올라갔느냐고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았느냐 입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든 내 안에 예수님의 형상이 드러난다면 그것이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하느님의 꿈은 우리가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꿈인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가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꿈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사명(使命)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 대한 사명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어느 날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앞으로 의사가 되라, 교사가 되라, 장사하는 사람이 되라, 사업가가 되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꿈을 통해서 알게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언하는 사람을 통해서 너는 앞으로 이것을 하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첫째, 사명은 내가 마음으로 소원하는 것입니다. (필리2,13) 13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①하느님은 우리에게 대한 꿈을 가지고 계시고 그 꿈이 우리 마음의 소원(所願)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에 선(善)한 소원(所願)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마음으로 보아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사명)을 알 수 있음은 우리 마음으로 소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사명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제일 크게 후회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한 것을 제일 크게 후회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 너무 많이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어도 부모의 눈치를 봅니다. 사회의 눈치를 봅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 후회하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입니다. 우리 마음의 소원이 하느님의 꿈인 줄 믿고 내가 하느님 앞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모든 신자들이 됩시다. ②둘째, 사명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하느님의 꿈이고 사명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도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면 절대 하느님이 주신 사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 하느님의 꿈이 될 수 없습니다. 푸틴은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를 삼키는 꿈입니다. 푸틴은 그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소원입니다. 그러면 그가 하고 싶다고 과연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꿈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野望)이며 욕망(慾望)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요셉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신 이유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흉년으로 위기에 처한 자신의 가족만 아니라 당시 전 세계에 닥친 흉년에서 당시의 모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꿈을 꾸는 모든 성도(聖徒)가 됩시다. ③셋째, 사명은 내가 생명을 버려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20,24) 24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오로는 “하느님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께 받는 사도바오로의 사명(使命)입니다. 그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입니다. 그것이 사도바오로가 “평생을 달려갈 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도바오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목이 베여 죽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나의 생명을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연세(年歲) 드신 분들은 대부분 자녀들입니다. 내가 아무리 아파도 힘이 들어도 자녀만 생각하면 힘이 납니다. 그리고 내 자녀를 위한 것이라면 내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자녀가 반드시 잘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내 자녀가 영적으로 잘 되고 육신적으로 잘 되기를 바랍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 뒹굴지 마십시오, 우리가 오늘과 내일의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잘라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몸부림치고, 함께 감옥에 가고, 함께 자유를 위해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꿈이 우리들 마음의 소원이 되어 날마다 꿈꾸며 기도하며,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날마다 몸부림치며 살아갑시다. 2.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을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필리2,13) 13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의 삶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게 함께 하신 것은 언제였습니까? 우리는 죄수였던 요셉이 꿈을 풀어주고 애굽의 총리가 되는 그 기적적인 순간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전 생애(生涯)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만일 요셉이 청소년 시절에 왕따를 당하지 않았다면, 애굽에 팔려가지 않았고, 그러면 요셉은 애굽이 총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청소년 시절에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것도 하느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또한 그가 보디발의 집에 팔려간 것도 하느님의함께 하심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을 보면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으므로, 그는 모든 일을 잘 이루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기 주인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서 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를 한 것도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한 하느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가정총무도 집안의 재산관리고 애굽의 총리도 애굽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가 파라오의 궁중감옥에 간 것도 하느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그래서 본문 20절과 21절을 보면 “20 그래서 요셉의 주인은 그를 잡아 감옥에 처넣었다. 그곳은 임금의 죄수들이 갇혀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그곳 감옥에서 살게 되었다. 21 그러나 주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시면서 그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전옥의 눈에 들게 해 주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감옥에 간 것이 하느님의 함께 하심입니까? 요셉은 궁중감옥에서 그가 장차 가게 될 파라오의 궁중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궁중감옥에서 미리 정치공부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감옥에 있은 것도 하느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또 감옥에서 헌작(獻爵) 시종장을 만나게 된 것도 하느님의 함께 하십니다. 또한 헌작 시종장이 감옥에서 나가서 2년 동안 요셉을 잊어버리게 된 것도 하느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헌작 시종장이 감옥에 나갈 때 요셉의 나이가 28세였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총리는 애굽의 법에 30살이 되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헌작 시종장이 감옥에 나가 2년 동안 요셉을 잊어버리게 된 것도 하느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그리고 파라오가 꿈을 꾸고 그 꿈을 통하여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도 분명한 하느님의 함께하심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향하신 하느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요셉의 전 생애(生涯) 가운데 하느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좋은 상황만을 생각합니다. 또 우리의 삶 가운데서 기적과 같은 일이 있을 때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 어떤 순간도 하느님이 함께 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상황이 마치 요셉이 애굽의 감옥에 있는 것과 같습니까?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금 상황이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상황입니까? 그래서 지금 내 삶을 보았을 때 그 어디에도 나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무지 내 삶 가운데서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잊어버리고 있는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절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느 한 순간도 무의미하게 보내지 맙시다. 비록 내가 감옥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느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죄의 유혹을 뿌리치시며 사람 앞에서 눈치 보면 살지 말고, 늘 하느님 앞에서 살아갑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꿈대로 우리 마음에 소원하는 그 소원의 항구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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