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창세기(53) 요셉을 감옥에 있게 하신 이유(理由) (창세40,1-23)
이전글 이전 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5-21 조회수375 추천수2 반대(0) 신고

 

창세기(53) 23. 5. 21. 일

요셉을 감옥에 있게 하신 이유(理由)

(창세40,1-23)

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이집트 임금의 헌작 시종과 제빵 시종이 그들의 주군인 이집트 임금에게 잘못을 저지른 일이 일어났다. 2 파라오는 자기의 이 두 대신 곧 헌작 시종장과 제빵 시종장에게 진노하여, 3 그들을 경호대장 집에 있는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곳은 요셉이 갇혀 있는 곳이었다. 4 경호대장은 요셉을 시켜 그들을 시중들게 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얼마 동안 갇혀 있었다. 5 그러던 어느 날 밤 이 두 사람, 곧 감옥에 갇힌 이집트 임금의 헌작 시종과 제빵 시종이 저마다 뜻이 다른 꿈을 꾸었다.

6 아침에 요셉이 그들에게 가 보니, 그들은 근심하고 있었다. 7 요셉은 자기 주인의 집에 함께 갇혀 있는 파라오의 이 두 대신에게 물었다. “오늘은 어째서 언짢은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8 그들이 “우리가 꿈을 꾸었는데 풀이해 줄 사람이 없다네.” 하고 대답하자,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꿈 풀이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저에게 말씀해 보십시오.”

9 헌작 시종장이 요셉에게 자기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있었네. 10 그 포도나무에는 가지가 셋이 있었는데, 싹이 돋자마자 꽃이 피어오르고 포도송이들이 익더군. 11 그런데 내 손에는 파라오의 술잔이 들려 있었다네. 그래서 내가 그 포도송이들을 따서 파라오의 술잔에다 짜 넣고는, 그 술잔을 파라오의 손에 올려 드렸네.”

12 그러자 요셉이 그에게 말하였다. “꿈 풀이는 이렇습니다. 가지 셋은 사흘을 뜻합니다. 13 이제 사흘이 지나면, 파라오께서는 나리를 불러올려 복직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나리께서는 전에 헌작 시종으로서 하시던 법대로 파라오의 손에 술잔을 올리시게 될 것입니다. 14 그러니 나리께서 잘되시면, 저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파라오께 저의 사정을 아뢰시어, 저를 이 집에서 풀려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15 사실 저는 히브리인들의 땅에서 붙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저는 이런 구덩이에 들어올 일은 아무것도 한 적이 없습니다.”

16 요셉이 좋게 풀이하는 것을 보고 제빵 시종장도 그에게 말하였다. “나도 꿈에 보니 내 머리 위에 과자 바구니가 세 개 있었네. 17 제일 윗 바구니에는 파라오께 드릴 온갖 구운 빵이 들어 있었는데, 새들이 내 머리 위에 있는 그 바구니에서 그것들을 쪼아 먹고 있었네.”

18 그러자 요셉이 대답하였다. “그 꿈 풀이는 이렇습니다. 바구니 셋은 사흘을 뜻합니다. 19 이제 사흘이 지나면, 파라오께서 나리를 불러올려 나무에 매달 것입니다. 그러면 새들이 나리의 살을 쪼아 먹을 것입니다.” 20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그날은 파라오의 생일이어서 그는 모든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고는 헌작 시종장과 제빵 시종장을 신하들 가운데로 불러올려, 21 헌작 시종장을 헌작 직위에 복직시키니, 그가 파라오의 손에 술잔을 올리게 되었다.

22 그러나 제빵 시종장은 나무에 매달게 하였다. 요셉이 그들에게 풀이하여 준 그대로였다. 23 그렇지만 헌작 시종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를 잊어버린 것이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감옥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옥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까 요셉이 감옥에서 아주 편안하게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 105편을 보면 요셉이 감옥에서 “18 사람들이 족쇄를 그의 발에 채우고 쇠사슬을 그의 목에 감았다.”라고 합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그 발이 족쇄(차꼬)를 차고 몸은 쇠사슬에 메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39장 20절-23절에 보면. “20 그래서 요셉의 주인은 그를 잡아 감옥에 처넣었다. 그곳은 임금의 죄수들이 갇혀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그곳 감옥에서 살게 되었다. 23ㄴ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으며, 그가 하는 일마다 주님께서 잘 이루어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만사형통(萬事亨通)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서 아무 어려운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만사형통이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입니다.

그 어떤 일을 당하든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꿈을 반드시 이루어가심이 형통입니다.

하느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하는데, 여전히 요셉은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에서 발이 족쇄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메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감옥 속에서도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창세기39장 21-23절을 보면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간수장이 옥중 죄수(罪囚)를 다 요셉의 손에 맡겼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감옥의 제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간수장은 요셉의 손에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습니다.

만일 시편에 기록된 대로 요셉이 감옥에서 발이 족쇄에, 몸이 사슬에만 묶여 있었다고 하면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감옥 속에서 헌작 시종장(술 맡은 관원)을 만날 수도 없고, 또 그의 꿈을 풀어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를 통해서 감옥에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감옥 속에서 요셉에게 살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감옥 속에서도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아서 감옥의 제반 사무를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찬송가 중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고 합니다. 거기서 말씀하고 있는 만사형통은 우리에게 아무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도 어려운 일을 있을 수 있습니다. 요셉처럼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하다가 억울한 일을 당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형통입니까?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 일속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입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일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심입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일 속에서도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을 하느님께서 이루어가심이 형통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반드시 하느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심을 믿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반드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심을 믿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그 꿈을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심을 믿읍시다. 그래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감옥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갑시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하느님께서 감옥 속에서도 어떻게 하느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까?

(창세40,1) 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이집트 임금의 헌작 시종과 제빵 시종이 그들의 주군인 이집트 임금에게 잘못을 저지른 일이 일어났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란 요셉이 감옥에 있어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감옥의 제반 사무를 담당하게 하신 후에 라는 말입니다. 마침 그때 애굽 왕의 헌작 시종장과 제빵 시종장이 애굽 왕에게 범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헌작 시종장과 제빵 시종장은 왕의 최측근입니다. 당시 왕을 음식으로 독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헌작 시종장과 제빵 시종장’은 애굽 왕이 제일 신임하는 관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면 이 두 관원장에게 애굽 왕 파라오가 노(怒)합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파라오가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있는 감옥에 보냅니다. 파라오가 궁중의 죄수들을 궁중 감옥에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보디발의 집에 있는 감옥에 보냅니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입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으로 두 관원을 만나게 하시기 위해서 파라오가 두 관원을 요셉이 있는 감옥으로 보낸 것입니다. 또 이때가 요셉이 감옥의 제반 사무를 담당하게 한 후이기 때문에 요셉은 이 두 관원을 마음대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친위 대장인 보디발이 요셉에게 두 관원을 시중들게 했습니다. 요셉에 대한 보디발의 오해가 풀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절에 요셉은 ‘그들을 섬겼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섬겼다고 하는 것은 진심을 다해서 섬긴 것을 말합니다. 이 곳에서도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죄수를 진심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그래서 5절과 6절을 보면 옥에 갇힌 두 관원이 꿈을 꾸었는데 그 꿈 때문에 그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습니다. 만일 요셉이 진심을 다해서 섬기지 않았다면 그들의 얼굴이 어떤지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두 관원의 얼굴에 근심이 있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남을 섬긴다는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 아닙니다. 그들의 얼굴빛이 어떤지, 근심이 있는지를 잘 살펴보고 그것에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7절에 이제 요셉은 두 관원에게 왜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8절에 두 관원들은 꿈을 꾸었지만 풀어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요셉이 “꿈 풀이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저에게 말씀해 보십시오.” 이것은 요셉에 내가 이것을 해석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모든 꿈의 해석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내게 깨닫게 하시면 내가 알려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요셉은 두 관원의 꿈을 풀어줍니다. 그리고 헌작 시종장은 감옥에서 나갑니다. 이때 요셉에 헌작 시종장에게 14절에 “그러니 나리께서 잘되시면, 저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파라오께 저의 사정을 아뢰시어, 저를 이 집에서 풀려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고 합니다.

그런데 23절에 “그렇지만 헌작 시종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를 잊어버린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로부터 2 년이 지난 뒤 헌작 시종장이 요셉을 기억하여 요셉이 감옥에서 나갑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올 때 나이가 17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2-3년 있었다고 하면 감옥에서 10년 정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느님께서 요셉의 전 생애가운데서 그와 함께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는데 왜 한두 해도 아니라 요셉으로 오랜 시간 동안 감옥에 있게 하셨습니까? 더욱이 마지막 2년 동안 요셉은 그가 꿈을 풀어주었던 ‘헌작 시종장’에게도 잊혀지는 시간을 보내야했습니까? 이것은 오늘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왜 지금 나의 삶이 풀리지 않습니까? 왜 내게 있는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까? 하느님 지금 내가 왜 요셉과 같이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곳에 있어야합니까?” 라고 하느님께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왜 요셉을 감옥에 있게 하십니까? 왜 우리를 감옥과 같은 곳에 있게 하십니까?

첫째, 감옥에서 말씀으로 단련시키기 위함입니다.

(시편105,16-19) 16 땅에 기근을 불러일으키시고 모든 양식을 끊으셨을 때 17 한 사람을 그들 앞에 보내셨으니 종으로 팔린 요셉이다. 18 사람들이 족쇄를 그의 발에 채우고 쇠사슬을 그의 목에 감았다. 19 마침내 그의 말이 들어맞아 주님 말씀이 그를 증명해 주시니 20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풀어 주고 민족들을 다스리는 이가 그를 놓아 주었다.

여기 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기근이 들것을 미리 아시고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애굽에 종으로 팔렸다가 감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요셉이 감옥에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응(應)할 때까지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요셉을 단련시키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단련하다는 것은 순금을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단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요셉으로 감옥에 있게 하신 것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 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다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신앙이 정금(正金)과 같은 신앙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왜 우리를 감옥과 같은 곳에 있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다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은,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그 무엇 때문에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것도 필요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감옥과 같은 곳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만을 인하여 하느님을 믿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내 안에 ‘그 무엇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신앙’을 다 제거하여 버리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감옥에서 오직 하느님만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하십니다.

또 우리 안에 하느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요셉에게 2년의 시간을 혼자 보내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본문 14절에 있는 것처럼 아직 요셉에게 사람을 의지하는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감옥과 같은 곳에 있게 하시는 것은 아직 우리 안에 사람을 의지하는 것들을 다 제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들이 다 제거될 때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꿈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둘째, 감옥 속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감옥(監獄)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었습니다. 하필이면 요셉이 감옥의 사무장이 된 후에 두 관원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있게 하십니까? 하필이면 두 관원이 간 감옥이 요셉이 있는 감옥입니까? 하필이면 그때 보디발의 마음이 풀려서 요셉으로 두 관원을 섬기게 합니까? 하필이면 두 관원이 꿈을 꾸게 됩니까? 하필이면 파라오의 생일이 되어 헌작 시종장이 풀려나가게 하십니까?

하필이면 헌작 시종장이 요셉을 2년 동안 잊게 하십니까? 만일 그때 헌작 시종장이 요셉을 기억해서 요셉이 감옥에서 나갔다면 2년 후에 요셉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비록 감옥에서의 삶은 화려한 삶이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 요셉과 하신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삶 가운데서 꽃봉오리와 같은 순간은 언제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요셉이 총리가 되는 순간만 꽃봉오리와 같은 순간이 아닙니다. 요셉의 인생의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도 요셉의 삶은 꽃봉오리와 같았습니다. 그 감옥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정현종 시인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으지도 모르는데...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중략-나이가 들수록, 꽃을 보는 마음이 달라진다. 젊어서는 무심히 지나치던 꽃들을 이제는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손톱만큼 작은 꽃도, 색색이 화려한 꽃도, 모두 저마다 아름답고 귀하다. 모든 순간이 나에게도 꽃봉오리인 것을...잘 지켜낼 수 있기를, 그래서 마침내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있기를...

그래서 우리 삶의 최고의 순간은, 삶의 꽃봉오리와 같은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옛날 과거에 잘 나갈 때인가요 아니면 아직 오지 않았습니까? 우리 삶의 최고의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 삶의 꽃봉오리와 같은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하찮게 보여도 다 노다지와 같습니다. 하느님께 맡기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 옆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 아름다운 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정현종씨의 시에서 꽃을 사람으로 바꾸어보겠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보는 마음이 달라진다. 젊어서는 무심히 지나치던 사람들을 이제는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손톱만큼 작은 사람도, 색색이 화려한 사람도, 모두 저마다 아름답고 귀하다. 모든 사람이 나에게도 꽃봉오리인 것을...잘 지켜낼 수 있기를, 그래서 마침내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있기를...

“당신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꽃입니다.” 그래서 혹 요셉과 같이 감옥과 같은 곳이 있습니까? 그곳에서도 하느님께 함께 하심을 믿으시고, 내게 주신 꽃과 같은 사람들을 더 잘 살피고, 그들에게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더 사랑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요셉에게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추락하는 것도 날개가 있습니다.

10 주님께서는 광야의 땅에서 울부짖는 소리만 들리는 삭막한 황무지에서 그를 감싸 주시고 돌보아 주셨으며 당신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 11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휘저으며 새끼들 위를 맴돌다가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들어 올려 깃털 위에 얹어 나르듯 12 주님 홀로 그를 인도하시고 그 곁에 낯선 신은 하나도 없었다.”(신명32,10-12)

이것은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을 독수리가 새끼를 돌보는 것과 같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먼저 새끼 둥지위에 가시 같은 것을 넣습니다. 그래서 그 가시 때문에 둥지에서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저 높은 둥지위에서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독수리를 날게 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독수리새끼는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때 독수리는 그 새끼 위를 너풀거리며 그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새끼 위를 맴돌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새끼가 위협에 처해있을 때 그 위에서 너풀거리던 독수리는 그를 날개로 엎습니다.

지금 요셉은 둥지에서 나와서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는 독수리 새끼와 같습니다. 아무리 날개 짓을 해도 계속해서 떨어집니다. 우리가 만일 독수리 새끼와 같이 날개 짓을 해도 계속 떨어지고 있다면 “지금 내 인생이 둥지를 떠난 독수리 새끼처럼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마치 독수리와 같이 예리한 눈동자로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의 날개로 내 위를 너풀거리며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묵상해야합니다.

우리도 인생이 계속해서 밑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느님 과연 내가 도대체 언제까지 내려 가야합니까? 아무리 내가 날개 짓을 해도 날지 못하고 계속해서 내려갑니다. 과연 하느님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까? 하느님 언제 나를 업어서 올리시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보고 큰 위로와 용기를 가져야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또 지켜보고 계시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위에서 주님의 날개로 너풀거리며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우리를 당신의 날개로 업어서 들어 올려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시도 주십니다. 그래서 그 가시 때문에 내 육신의 보금자리에서 하느님 앞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또 어린 나로 하여금 스스로 날개 짓을 하게 하기 위해서 내 인생을 밑으로 내려가게 하십니다. 내가 내려가고 있는 순간에도 주님의 날개가 내 삶의 그늘이 되어주십니다. 주님의 날개가 나를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내 인생이 정말 바닥을 치려고 하는 순간 도무지 내 힘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순간, (전능하신 하느님의 손으로) 그 어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느님의 기적의 손으로 나를 안아주시고 받아주셔서 나를 들어서 올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추락하는 가운데 떨어질 때 주님의 날개로 우리를 지켜주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날개를 달아주십니다. 우리는 추락해도 날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로 날아올라가게 하십니다.

(이사40,30-31)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오늘도 지금 인생의 감옥에서 무엇을 바라봅니까. 감옥입니까? 아니면 그 속 계시는 하느님입니까? 오늘도 요셉처럼 내 인생이 감옥과 같은 곳에 있다 하더라도 그 곳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주신 날개로 날마다 하느님을 향하여 날아 올라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