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승천 대축일 가해, 홍보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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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5-21 | 조회수258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주님 승천 대축일 가해, 홍보주일] 마태 28,16-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의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모습을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구절을 그리스어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구름이 그들의 시야에서 예수님을 맞아들였다’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 높은 곳으로 계속 올라가시어 우리와 아주 멀리 있는 어느 장소에 가셨다는게 아니라, 구름에 감싸여 더 이상 육체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존재로 변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미지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탈출 24,15에서는 구름이 시나이 산 전체를 덮어 모세를 볼 수 없게 만듭니다. 타볼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도 갑자기 구름이 일어 일행 모두를 덮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구름에 덮일 때 하느님의 뜻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구름에 덮였을 때엔 하느님의 뜻인 십계명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구름에 덮였을 때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 체험은 하느님의 심오한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보다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던 주님이 구름에 덮여 보이지 않게 되자, 그분의 갑작스러운 부재 상황에 막막해진 제자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하늘만 멍하니 바라봅니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고 다그치지요. 그리고 나서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며 주님의 심오한 뜻과 계획을 그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를 막연히 기다리며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고 허송세월하다가 준비 안된 채로 종말의 때를 맞지 말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과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여 구원으로 이끄는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메시지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입을 통해서도 선포됩니다.
그 메시지가 선포되는 배경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입니다. 여인들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고, 갈릴래아에서 당신을 만나게 되리라’는 메시지를 전해들은 제자들은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뵙고 엎드려 경배하지요. 그런데 주님을 다시 만난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한 그 자리에 의심하는 제자들도 있었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여기서 ‘의심하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본래 ‘주저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겪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으로 미리 알려주셨던 하느님의 뜻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자기들 눈으로 직접 보았음에도, 제자들은 주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르기를 주저했던 겁니다. 참으로 서글프고 답답한 현실이지만, 그런 부족함과 약함도 우리의 신앙이 지닌 분명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분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이, 강렬한 신비체험과 놀라운 기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분명하게 느낀 성인들이 의심의 ‘어둔 밤’과 영적 ‘사막’을 지나갔음을 생각하면,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겪는 의심과 주저함은 그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되는 것이지요.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는게, 의심하고 주저하다가도 ‘에라 모르겠다’하고 주님께 투신하는게 신앙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와 늘 함께 하기를 바라시며 실제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런 주님의 의지와 새로운 현존 방식을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승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항상 우리 곁에 머무르기를 바라시는 당신 사랑의 의지를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승천은 그 사랑의 의지가 실현되는 방식이자 과정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기 위해, 우리 삶 속에 당신께서 머무르실 자리를 마련하시는 일을 우리는 ‘승천’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모두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주님께서 오르신 ‘하늘’은 지상에서 몇 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특정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신 곳을 뜻합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무소부재’ 즉 계시지 않은 곳이 없이 원하시면 언제 어디서든 계실 수 있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 안에 계시고, 우리에게 참된 영혼의 양식을 주시는 성체성사 안에도 계십니다. 둘 이상이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당신께 기도하는 형제 자매들 안에 계시고, 우리 자비의 손길을 바라는 힘 없고 가난한 이웃들 안에 계십니다. 또한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는 완전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봉사자들 안에도 계십니다. 이처럼 승천은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증이자, 동시에 우리 또한 언제나 그분과 함께 머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소명이기도 한 것이지요.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 눈으로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뜻과 계명을 실천할 때, 그분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심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붙들려는 나의 의지와 노력 안에 그분께서 함께 계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잊지 않는 우리의 자비로운 마음 안에 그분께서 함께 계십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받은 아픔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함께 기뻐하여 그 기쁨을 두배로 만들고, 함께 슬퍼하여 그 슬픔을 절반으로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용기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원수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시는 주님 말씀을 부족할지라도 어떻게든 행동으로 옮겨보는 우리의 실천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이렇듯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다양한 모습과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과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도 ‘승천’하는 방법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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