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7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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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3-05-25 | 조회수667 | 추천수8 | 반대(0)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늘 ‘인원점검’을 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출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순례단과 떨어지게 되면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있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계속 움직이면 오히려 찾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단체로 이동할 때는 함께 다니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즘은 여행을 많이 다니셔서 혼자서 이탈하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모임 시간도 대부분 잘 지키고 있습니다. 함께 해야만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말도 자주 들었습니다. 마스크 착용과 거리두기는 팬데믹을 살아가는 ‘상식’처럼 되었습니다. 전염력이 강한 바이러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거리두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박해시대에도 멈추지 않았던 미사까지 멈추었습니다. 뭉쳐야 할 때가 있고, 흩어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대한 식별입니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바구니가 부딪치면 계란이 모두 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식 투자를 할 때도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한 곳에 모두 투자하면 이익도 클 수 있지만 손실도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국가의 무역도 비슷합니다. 어느 특정국가에만 의존하면 편할 수는 있지만 위기의 상황이 다가오면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무역은 다각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안보에는 이념이 있지만 경제에는 이념이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개혁과 개방을 시작하면서 ‘흰 토끼든 검은 토끼든 쥐만 잡으면 된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중국은 자본주의라는 토끼를 받아들였고 가난이라는 ‘쥐’를 잡았습니다. 지정학적으로 대한민국은 중국과 가까이 있습니다. 안보라는 계란은 미국이라는 동맹과 굳건히 담아야 합니다. 그러나 경제라는 계란은 중국이라는 바구니에 담아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안보와 경제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냉엄한 국제질서를 헤아릴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이끌었습니다. 기원전 500년쯤에 그리스, 인도, 중국에는 인류의 여명을 밝혀주었던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학자들은 이 당시에 풍성했던 학문과 지식의 시대를 ‘현의시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힘을 합쳐서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천사와 부활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그런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파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바오로 사도를 변호하였습니다. 결국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는 서로 대립하였고, 바오로 사도는 박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지혜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서로의 입장, 서로의 이익만 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혼탁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지, 어느 것이 악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식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제자,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원의 중심에서 원의 둘레는 모두 같은 거리에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럴 때 서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게 됩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학연, 지연, 혈연, 사상, 이념, 종교라는 틀로 차별하지 않게 됩니다. 바리사이파는 자신들이 지키는 율법을 중심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방인들, 죄인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 그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중심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 로마라는 힘에 저항하는 이들, 죽은 이들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이들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 그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기득권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이들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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