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56) 진정한 가족(家族)의 의미 (창세43,1-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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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5-25 | 조회수28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56) 23. 5. 24. 수 진정한 가족(家族)의 의미 (창세43,1-16) 1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다. 2 그래서 그들이 이집트에서 가져 온 곡식을 다 먹어 갈 때,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다시 가서 양식을 좀 사 오너라.” 3 그러자 유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그 사람이 저희에게 엄중히 경고하면서, ‘너희 아우와 함께 오지 않으면, 너희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4 아버지께서 아우를 저희와 함께 보내시면, 내려가서 아버지께 양식을 사다 드리겠습니다. 5 그러나 그 아이를 보내시지 않으면, 저희는 내려가지 못합니다. ‘너희 아우와 함께 오지 않으면, 너희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고 그 사람이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6 그래서 이스라엘이 “너희는 어찌하여 아우가 또 있다는 소리를 해서 나를 괴롭히느냐?” 하고 말하자, 7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이 저희와 우리 가족에 대해 낱낱이 캐물으면서,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다른 형제가 또 있느냐?’ 하기에, 저희는 묻는 대로 대답했을 뿐입니다. 저희에게 아우를 데려오라고 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8 유다가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하였다. “그 아이를 저와 함께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일어나 떠나가겠습니다. 그래야 저희도, 아버지도, 그리고 저희의 어린것들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9 제가 그 아이를 맡겠습니다. 그 아이에 대해서 저에게 책임을 물으십시오. 제가 만일 그 아이를 아버지께 도로 데려와 아버지 앞에 세우지 않는다면, 제가 아버지에 대한 그 죄를 평생 동안 짊어지겠습니다. 10 저희가 이렇게 머뭇거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벌써 두 번은 다녀왔을 것입니다.” 11 그러자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정 그렇다면 이렇게 하여라. 이 땅의 가장 좋은 토산물을 너희 포대에 담아 그 사람에게 선물로 가지고 내려가거라. 약간의 유향과 꿀, 향고무와 반일향, 향과와 편도를 가져가거라. 12 돈도 두 배로 가져가거라. 너희 곡식 자루 부리에 담겨 돌아왔던 돈도 도로 가져가거라. 그것은 아마도 무슨 착오였을 것이다. 13 너희 아우를 데리고 일어나 그 사람에게 다시 가거라. 14 너희가 그 사람 앞에 섰을 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그 사람이 너희의 다른 형제와 벤야민을 보내 주기를 바란다. 자식을 잃어야 한다면 나로서는 잃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15 그리하여 이 사람들은 선물을 마련하고 돈도 갑절로 준비하여, 벤야민을 데리고 길을 떠나 이집트로 내려가 요셉 앞에 섰다. 16 요셉은 그들과 함께 벤야민이 있는 것을 보고, 자기 집 관리인에게 일렀다. “이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가거라. 짐승을 잡고 상을 차려라. 이 사람들은 나와 함께 점심을 먹을 것이다.” ‘사람은 넘어지고 사탄은 넘어지게 하고 하느님은 일으켜 세우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일으켜 주시고 새워주시고 살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에게 전 세계적인 기근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살려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더 풍성히 얻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창세기42장과 43장에서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42장에서 야곱은 아들들에게 기근으로 인해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죽지 않고 살리라고 합니다(창세42,2). 그리고 요셉도 형들에게도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창세42,18-20) 18 사흘째 되던 날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살려거든 이렇게 하여라. 나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19 너희가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너희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만 감옥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굶고 있는 너희 집 식구들을 위하여 곡식을 가져가거라. 20 그리고 너희 막내아우를 나에게 데려오너라. 그러면 너희 말이 참되다는 것이 밝혀지고, 너희는 죽음을 면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요셉은 형들에게 동생을 데리고 오라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가 죽지 않고 살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요셉이 형들에게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죽지 않고 살리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요셉이 인간적으로 동생 베냐민을 보고 싶어서만 아닙니다. 창세기42장에서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꿈은 10형제가 아니라 11형제가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0형제만 자신에게 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꿈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꾼 꿈은 지금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있을 때는 문자로 기록된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시대에는 꿈이 하느님의 계시(啓示)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꾼 꿈대로 동생을 데리고 오면 살리라고 한 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살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실패한 이유는 좋은 환경이었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록 극심한 기근의 때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은 야곱에게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베냐민만은 절대 보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42장 38절에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갈 수 없다. 그의 형은 죽고 그 아이만 홀로 남았는데, 그 아이가 너희와 함께 가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게 되면, 너희는 이렇게 백발이 성성한 나를, 슬퍼하며 저승으로 내려가게 하고야 말 것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만일 너희가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는 길에서 요셉과 같이 재난을 당하여 그가 죽게 되면 나는 저승(스올)으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스올이란 죽음을 뜻합니다. 베냐민이 죽으면 나도 죽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야곱은 베냐민만 데리고 갈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기근이 더 심하여집니다. (창세43,1) 1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다. 여기서 심하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이 기근이 더 심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2절에 이제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도 다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들들에게 다시 애굽으로 가서 양식을 조금 사오라고 합니다. 유다가(3-5) 아우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우리가 애굽으로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야곱이 6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애굽의 총리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고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먼저 말한 것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자세히 질문을 하여 우리가 그 묻는 말에 따라 대답한 것뿐이라고 합니다(7). 그러면서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우리 모두가 죽지 않고 사는 길을 이야기 합니다. (창세43,8) 8 유다가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하였다. “그 아이를 저와 함께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일어나 떠나가겠습니다. 그래야 저희도, 아버지도, 그리고 저희의 어린것들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유다가 마지막으로 야곱의 마음을 돌이키는 이야기를 합니다. (창세43,9) 9 제가 그 아이를 맡겠습니다. 그 아이에 대해서 저에게 책임을 물으십시오. 제가 만일 그 아이를 아버지께 도로 데려와 아버지 앞에 세우지 않는다면, 제가 아버지에 대한 그 죄를 평생 동안 짊어지겠습니다. 유다는 “내가 베냐민을 위하여 책임(담보)이 되겠습니다.”고 합니다. 여기서 담보란 내가 그를 위하여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생명을 죽여서라도 반드시 베냐민을 데리고 오겠습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를 아버지에게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어 그 죄 값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범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유다의 위대성은 그의 잘못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네가 옳고 내가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다는 자신이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유다의 모습에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 재물이 되신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우리가 죽지 않고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유다가 자신이 죽어서라도 베냐민을 데리고 오겠다고 하니까 야곱은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너희 아우를 데리고 일어나 그 사람에게 다시 가거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삶은 끝까지 움켜잡는 삶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장자의 명분을 움켜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에사우에게 20년 동안 쫓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랑하는 라헬이었습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7년을 수고해도 하나도 힘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녀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야곱은 라헬의 소생인 요셉을 움켜잡았습니다. 그만 사랑하고 편애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요셉도 잃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노년에 이른 야곱에게는 베냐민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갈 때도 베냐민만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애굽에서 와서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한다고 하니까 야곱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야곱의 집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야곱은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벌써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일이 있었을 때 야곱은 한마디를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때 야곱을 보면서 비겁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으로서 야곱의 입장에서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만일 그때 야곱이 흥분하여서 스켐 사람들과 싸우자고 했다면 야곱의 가족들을 더 이상 가나안땅에서 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집에서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외톨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 집착입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한 가지에만 집착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에게 집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이제 베냐민에게 집착합니다. 그래서 아들들이 베냐민을 내려놓으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 장자 르우벤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베냐민을 내려놓으라고 해도 내려놓지 못합니다. 이런 심리를 가리켜 보속증(保續症)이라고 합니다. 한번 집착하는 감정을 가지면 그 감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해서 보존하고 지속하려는 증상입니다. 그러니 이성적으로는 이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집착하려는 감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해서 지속하고 보존하려는 심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그가 마지막에 한 가지 붙들고 있었던 베냐민을 내려놓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마지막에 붙들고 있었던 베냐민을 내려놓게 된 이유가 ~ (창세43,14) 14 너희가 그 사람 앞에 섰을 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그 사람이 너희의 다른 형제와 벤야민을 보내 주기를 바란다. 자식을 잃어야 한다면 나로서는 잃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놀라운 신앙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베냐민보다 자신이 죽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자식을 일어야 한다면 나로서는 잃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라고 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죽여도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반드시 살려주신다는 신앙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리라는 신앙입니다. 여기서 가엾이 여기심으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는 직역을 하면 “여성의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만일 하느님께서 전능하시기만 하시고 자비심이 없으시다면 하느님은 힘이 있지만 우리의 아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또한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픔과 슬픔 가운데 넘어져 있을 때 왜 너는 일어서지 못하니, 왜 너는 그것밖에 못하니 라고 추궁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자신의 가슴으로 느끼시는 분십니다. 마치 여성이 자신의 자궁으로 낳은 자녀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우리는 불쌍히 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특별히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을 때 더욱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자식을 잃어야 한다면 나로서는 잃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했을 때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은 절대 우리 자녀를 잃지 않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 내 자존심도 잃어야 한다면 잃는 수밖에 없다 고 하였을 때,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은 절대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을 때 우리의 진정한 자존심을 세워주십니다. (창세43,16) 16 요셉은 그들과 함께 벤야민이 있는 것을 보고, 자기 집 관리인에게 일렀다. “이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가거라. 짐승을 잡고 상을 차려라. 이 사람들은 나와 함께 점심을 먹을 것이다.” 야곱은 베냐민을 내려놓았을 때 죽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벤야민과 형제들을 위해서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줍니다. (창세43,30) 30 요셉은 자기 아우에 대한 애정이 솟구쳐 올라 울음이 나오려고 해서,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울었다. 여기서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14절에 나오는 하느님의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동생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주셔서 얼굴을 씻고 돌아올 정도로 울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야곱과 그 자녀들을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인 이스라엘로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야곱의 자녀들을 진정한 가족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가족은 나보다 우리입니다. 기근이 있기 전에 야곱의 가족은 콩가루 집안이었습니다. 모두가 각기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큰 기근이 있으니까 야곱은 애굽에 가서 우리를 곡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죽지 않고 살 것이다 합니다. (창세43,4) 4 아버지께서 아우를 저희와 함께 보내시면, 내려가서 아버지께 양식을 사다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유다는 베냐민을 단순히 배가 다른 야곱의 아들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같이 우리 동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다는 베냐민을 우리 아우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오겠습니다’ 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가족(家族)은 나보다 우리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그 사람이 가족인가 아닌가는 위기 때에 알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오직 나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닥치니까 우리가 되는 것이 가족입니다. 우리가 가정이 위기의 때에 나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우리를 생각하십니까? 위기의 때에 나만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가족이 아닙니다. 그런데 위기의 때에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면 그 사람이 진정한 가족입니다. 위기의 때에 나보다 우리를 먼저 더 생각해서 위기의 때에 진정한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족의 의미는 희생입니다. 가족은 서로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본문 아래 34절을 보면 “요셉이 자기 상(床)에서 각 사람의 몫을 나르게 하는데, 벤야민의 몫이 다른 모든 이들의 몫보다 다섯 배나 많았다. 그들은 요셉과 함께 마시며 즐거워하였다.”고 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다른 형제들보다 벤야민에게 다섯 배의 음식을 주면 시기하고 미워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형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베냐민도 우리 동생이고, 우리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잔치 날에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기쁜 잔치 날이 제삿날에 되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과 형제들이 서로 즐겁게 잔치를 즐기기까지 가족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유다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야곱은 절대 내려놓을 수 없는 벤야민을 내려놓았습니다. 이와 같이 기쁨의 잔치를 위해서 희생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가족입니다. 정말 화목한 가정의 특징은 그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매주 기쁨의 잔치를 베푸는 곳이 될 수 있음은 이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왜 가정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희생해야하는가? 하는 사람은 진정한 가족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면 그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교회를 위해서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또 진정한 가족은 서로를 향한 자비가 있습니다. 야곱이 벤야민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을 때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자비로운 마음으로 요셉은 벤야민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진정한 가족은 서로를 향한 자비가 있습니다. 자비(慈悲)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11장에서 사도바오로는 그가 받았던 고난의 목록들을 말합니다. 내가 유대인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씩이나 맞았고, 강도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8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 29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다른 사람 때문에 죄를 지으면 나도 분개하지 않겠습니까?”(2코린11,28-29) 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향해서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자비가 필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불쌍한 자들입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야곱도 불쌍하고 야곱의 자녀들도 불쌍합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이 로마노도 불쌍하고 우리들 다 불쌍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4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에페2,4-5)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비란 동정심이 아닙니다. 동정심이란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나보다 못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란 하느님 앞에서 모두 불쌍한 사람으로 서로 같이 불쌍히 여겨주는 것입니다. 요셉과 같이 서로를 불쌍히 여겨줄 수 있는 진정한 가족들이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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