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57) 은잔(銀杯)의 시험(試驗) (창세44,1-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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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5-26 | 조회수337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창세기(57) 23. 5. 25. 목 은잔(銀杯)의 시험(試驗) (창세44,1-18) 1 요셉이 자기 집 관리인에게 명령하였다. “저 사람들의 곡식 자루에다 그들이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양식을 채워 주어라. 그리고 각자의 돈을 그들의 곡식 자루 부리에 넣는데, 2 막내의 곡식 자루 부리에는 곡식 값으로 가져온 그의 돈과 함께 내 은잔을 넣어라.” 그는 요셉이 분부한 대로 하였다. 3 이튿날 날이 밝자 그 사람들은 나귀들을 끌고 길을 나섰다. 4 그들이 그 성읍을 나와 얼마 가지 않았을 때, 요셉이 자기 집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그 사람들을 쫓아가거라. 그들을 따라잡거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5 이것은 내 주인께서 마실 때 쓰시는 잔이며 점을 치시는 잔이다. 너희는 고약한 짓을 저질렀다.’” 6 관리인이 그들을 따라잡고 이렇게 말하자, 7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리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리의 이 종들이 그런 짓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8 보십시오, 저희는 지난번 곡식 자루 부리에서 발견한 돈을 가나안 땅에서 가져다 나리께 되돌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어찌 나리의 주인댁에서 은이나 금을 훔칠 수 있겠습니까? 9 나리의 이 종들 가운데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도 나리의 종이 되겠습니다.” 10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좋다. 너희 말대로 하자.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나의 종이 된다. 그러나 나머지는 자유롭게 가도 좋다.” 11 그들은 서둘러 곡식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저마다 제 곡식 자루를 풀었다. 12 관리인이 큰아들부터 시작하여 막내아들에 이르기까지 뒤지자, 그 잔이 벤야민의 곡식 자루에서 나왔다. 13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의 옷을 찢고 저마다 나귀에 짐을 도로 실은 뒤, 그 성읍으로 되돌아갔다. 14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러 보니, 그는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자, 15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더냐?” 16 유다가 대답하였다. “저희가 나리께 무어라 아뢰겠습니까? 무어라 여쭙겠습니까? 또 무어라 변명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종들의 죄를 밝혀내셨습니다. 이제 저희는 나리의 종입니다. 저희도, 잔이 나온 아이도 그러합니다.” 17 그러나 요셉은 말하였다.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잔이 나온 사람만 내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에게 올라가거라.” 18 그러자 유다가 그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나리, 이 종이 감히 나리께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나리께서는 파라오와 같으신 분이시니, 이 종에게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요셉이 드디어 동생 베냐민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베냐민과 형제들을 위해서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보자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숨어서 크게 울었습니다. 이쯤 되면 요셉은 자신이 요셉인 것을 밝힐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이 형들을 시험(試驗)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44,1-2) 1 요셉이 자기 집 관리인에게 명령하였다. “저 사람들의 곡식 자루에다 그들이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양식을 채워 주어라. 그리고 각자의 돈을 그들의 곡식 자루 부리에 넣는데, 2 막내의 곡식 자루 부리에는 곡식 값으로 가져온 그의 돈과 함께 내 은잔을 넣어라.” 그는 요셉이 분부한 대로 하였다. 요셉은 집 관리인(청지기)에게 양식을 형들의 자루에 채우고 돈도 그 자루에 넣으라고 합니다. 요셉의 은잔(銀盞)을 그 막내의 자루에 넣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 막내는 벤야민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아침에 밝을 때에 형제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냅니다(3). 그리고 형제들이 성읍에서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형제들을 따라 가서 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고 말하라고 합니다(4). 그리고 “이것은 내 주인께서 마실 때 쓰시는 잔이며 점을 치시는 잔이다. 너희는 고약한 짓을 저질렀다.”고 합니다(5). 여기서 은잔(銀盞)은 요셉이 늘 점치는데 쓰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실재 요셉이 은잔으로 점을 쳤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잔은 애굽에서 일반적으로 점을 치는데 사용하는 것인데, 너희가 왜 이것을 가지고 갔느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형들이~ (창세44,7-9) 7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리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리의 이 종들이 그런 짓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8 보십시오, 저희는 지난번 곡식 자루 부리에서 발견한 돈을 가나안 땅에서 가져다 나리께 되돌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어찌 나리의 주인댁에서 은이나 금을 훔칠 수 있겠습니까? 9 나리의 이 종들 가운데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도 나리의 종이 되겠습니다.” 요셉의 형들을 우리는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루에 있는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 당신에게 가지고 온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요셉의 집에서 은(銀)이나 금(金)을 도둑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 중에 누구에게서 은잔이 발견되면 그는 죽을 것이고 우리는 종이 되겠습니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종은 말하기를 은잔이 누구에게 발견이 되면 그 사람만 종이 되고 너희들을 죄가 없으리라고 합니다(10). 그래서 각각 자루를 풉니다(11). 그리고 나이 많은 형부터 자루를 풀어서 조사하였는데, 그 은잔이 벤야민의 자루에서 발견이 됩니다(12). (창세44,13-14) 13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의 옷을 찢고 저마다 나귀에 짐을 도로 실은 뒤, 그 성읍으로 되돌아갔다. 14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러 보니, 그는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자, 여기 보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유다가 형제들의 대표로 나옵니다. 그래서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형제들의 대표인 유다가 말합니다. (창세44,16) 16 유다가 대답하였다. “저희가 나리께 무어라 아뢰겠습니까? 무어라 여쭙겠습니까? 또 무어라 변명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종들의 죄를 밝혀내셨습니다. 이제 저희는 나리의 종입니다. 저희도, 잔이 나온 아이도 그러합니다.” 유다는 하느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변화된 유다와 형제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변화되기 전의 형제들이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벤야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이 되었다면 이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가 벤야민만을 사랑해서 보기 싫었는데, 잘 되었다. 우리 잘못이 아니니 우리만 아버지 집으로 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벤야민을 홀로 두지 않습니다. 벤야민과 함께 다시 요셉이 있는 성(城)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지금 유다와 형제들은 비록 자신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이 일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찾아내셨다’고 합니다. 예전에 요셉을 억울하게 팔아넘긴 죄악입니다. 그때 아버지 야곱이 옷을 찢으면서 나도 같이 죽고 싶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악을 하느님께서 찾아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잔을 훔치지 않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가 죄인입니다. 그러니 우리와 벤야민이 모두 그 죄에 대한 댓가로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은잔이 발견된 벤야민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17). 그러니까 유다가~ (창세44,30-31) 30 이렇게 아버지의 목숨이 그 애의 목숨에 달려 있는데, 이제 그 아이 없이 제가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에게 돌아갔을 때, 31 그 아이가 없는 것을 보게 되면, 아버지는 죽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종들은 결국, 나리의 종인 백발이 성성한 저희 아버지를, 애통해하며 저승으로 내려가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벤야민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벤야민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우리 아버지가 죽습니다.”고 합니다. (창세44,32) 32 나리의 이 종은 제 아버지에게 그 아이를 맡겠다고 하면서, ‘제가 만일 그 아이를 아버지께 도로 데려오지 않는다면, 제가 아버지 앞에서 그 죄를 평생 짊어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아버지에게 내가 벤야민을 위한 담보 즉 희생재물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벤야민을 아버지에게로 데리고 가지 않으면 내가 아버지에게 영원히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벤야민을 함께 보내지 아니하면 우리는 절대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45장에서 요셉이 더 이상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크게 울면서 형들에게 “내가 요셉이라”고 합니다(창세45,3). 그러면 창세기 44장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은잔(銀杯)의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참된 회개가 있어야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면 외강내유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강내유(外剛內柔)란 겉으로는 강하고 꿋꿋하게 보이나 속은 부드럽고 순한 성격입니다. 요셉은 겉으로는 엄격한 사람 같지만 속으로는 부드럽고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처음 형들을 만났을 때 밖에 나가서 울었습니다(창세42,24). 그리고 동생을 볼 때도 마음이 복받쳐 안방에 들어가서 얼굴을 씻을 정도로 울었습니다(창세43,30-31). 그리고 마지막에 유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더 이상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파라오의 궁전에 들리기 까지 울었습니다(창세45,1,2). 그래서 인간적인 감정대로 한다면 요셉은 처음부터 자신을 밝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의 모든 죄를 무조건 다 용서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화해를 하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철저히 감정을 억제합니다. 그래서 형들을 대할 때도 차갑고 엄한 소리로 말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도 요셉은 형들을 은잔으로 시험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요셉이 감정을 억제했습니까? 그 이유는 요셉이 꾼 꿈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꾼 꿈이란 지금으로 하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감정적으로는 바로 화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의 감정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바로 화해를 하지 않고 도리어 잔치를 베풀고 난 다음에 은잔으로 형들을 시험하는 이유는 진정한 회개(悔改)가 있어야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짐을 요셉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은잔의 시험을 통해서 형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했습니다. 형들은 은잔의 시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찾아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겠다고 합니다.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고,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음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야합니다.
(호세7,1-2) 1 내가 내 백성의 운명을 되돌려 주려고 할 때마다 이스라엘의 병을 고쳐 주려고 할 때마다 에프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행만 드러난다. 그들이 거짓을 일삼기 때문이다. 안에는 도둑이 들고 바깥에는 강도떼가 들끓는다. 2 내가 그들의 악을 모두 기억하고 있음을 그들은 마음에 두지 않지만 이제 그들을 둘러싼 행실들이 내 앞에 펼쳐져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의 죄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치료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처 주위에 소독약만을 바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환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해서 단순히 소독약만 바르는 분이 아닙니다. 호세아서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게 하십니다. 초대교회 때도 어떻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3장 19절에 “19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실 형들은 은잔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은잔에 있어서는 그들은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형들은 은잔의 시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 종들의 죄를 밝혀내셨습니다.” 라고 합니다. 우리가 특정한 죄에 대해서는 우리가 깨끗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보았을 때 우리 가운데 죄가 없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고 고백할 때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형들과 같은 은잔의 시험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은잔은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은잔의 시험이 있을 때 그 점에 있어서는 깨끗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죄인 됨을 고백해야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회복의 역사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의 죄악들을 두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가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 우리가운데 진정한 회복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또 창세기44장에 나타난 은잔의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그것은 참된 믿음은 약한 자를 어떻게 돌보느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은잔을 통해서 형들이 진정으로 회개를 했는가를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또 요셉은 은잔의 시험을 통해서 형들이 동생 베냐민을 어떻게 하는가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벤야민의 자루에 은잔이 발견이 되었는데, 옛날의 형들이었다면 ‘벤야민의 자루에만 은잔이 있으니 이것은 벤야민만의 문제’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벤야민만 두고 아버지 집으로 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형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형들은 우리는 절대 벤야민을 두고 아버지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벤야민과 같이 요셉의 노예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은잔의 시험을 통해서 형들의 참된 믿음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벤야민과 같은 약한 자를 내 몸과 같이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2코린13,5) 5 자기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따져 보십시오. 스스로 시험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아닌지는 우리 속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모시고 있는지 아닌지를, 단순히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운데 벤야민과 같은 약한 자를 어떻게 대하느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 가운데서 그 사람이 정말 예수를 믿고 있는지 아닌 지를 마지막 날에 시험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은 양과 염소로 나누십니다. 예수님은 양 편에 속한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으면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病)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獄)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다고 하십니다. 양(羊)편에 속한 사람들이 우리가 언제 주님이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으면 병드신 것을 보고 가서 보았습니까? 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염소 편에 속한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주릴 때 먹을 것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 돌보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잘 섬겼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십니까?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주위에 베냐민과 같은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님처럼 섬길 수 있습니다. 또 창세기44장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번째, 우리의 모든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44,30-31) 30 이렇게 아버지의 목숨이 그 애의 목숨에 달려 있는데, 이제 그 아이 없이 제가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에게 돌아갔을 때, 31 그 아이가 없는 것을 보게 되면, 아버지는 죽고 말 것입니다. 유다는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은 하나로 묶여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일 이 아이가 잘못되면 아버지는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먼저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관계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생명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아프면 모두가 아픕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힘이 들면 모두가 힘이 듭니다. 우리의 모든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창세기44장 30절의 말씀은 여기서 나타난 아버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벤야민은 우리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예수님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의 생명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잘못되면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의 생명보다 더 귀한 외아들(獨子) 예수님을 희생재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재물이 되셨습니다. 왜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수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이 있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음을 항상 기억하면서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고 계시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으로 넉넉히 이기며 살아갑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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