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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59) 하느님의 뜻을 구(求)한 이스라엘 (창세4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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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5-26 조회수216 추천수2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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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59)  23. 5. 27.

 

하느님의 뜻을 구()한 이스라엘

 

(창세46,1-7)

1 이스라엘은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그는 브에르 세바에 이르러 자기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다. 2 하느님께서 밤의 환시 중에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부르시자, “, 여기 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3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4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의 손이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 5 그리하여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났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태워 오라고 파라오가 보낸 수레들에 아버지 야곱과 아이들과 아내들을 태웠다. 6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얻은 가축과 재산을 가지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이 함께 들어갔다. 7 야곱은 아들과 손자, 딸과 손녀, 곧 그의 모든 자손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야곱은 죽었던 줄 알았던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야곱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자기를 태우러 온 수레를 보고 믿었습니다. 비로소 기운이 살아났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죽기 전에 가서 요셉을 보리라고 합니다(창세45,28). 그러면 요셉이 보내준 수레를 타고 당장 애굽으로 가야합니다.

 

(창세46,1) 1 이스라엘은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그는 브에르 세바에 이르러 자기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다.

 

성경에 보면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도 나오고 야곱으로도 나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변화된 야곱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하느님의 백성의 모습을 보여줄 때는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또 야곱이 인간적인 모습을 할 때 야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절에 야곱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변화된 야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 즉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오라는 요셉의 이야기를 듣고 모든 소유를 이끌고 애굽이 아니라 브엘세바로 갑니다. 브엘세바는 가나안의 가장 남쪽에 있는 곳으로 가나안과 애굽의 접경에 있습니다.

과연 애굽으로 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변화되기 전의 야곱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뜻을 이루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자기가 사랑하는 라헬을 가지려 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뜻대로 하느님도 이기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지금 야곱의 나이가 130살입니다. 야곱은 단순히 나이가 많은 것만이 아니라 그동안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성숙했습니다. 옛날의 야곱이었다면 그렇게 보고 싶은 요셉이 살아 있다고 하면 당장 애굽으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보고 싶은 요셉이 애굽으로 오라고 하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또 야곱이 애굽으로 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알고 싶었던 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기근이 들어 가나안 땅을 떠나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사라를 잃어버릴 뻔 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아버지 이사악도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가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이사악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세26,2). 무엇보다 가나안 땅은 하느님께서 복을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애굽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숙한 야곱의 입장에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인지 알고 싶어서 브엘세바로 갔습니다. 또 이 브엘세바는 아버지 이사악이 제단을 쌓고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던 곳이었습니다(창세26,25). 그래서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과 같이 이사악의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애굽으로 가는 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인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창세46,2) 2 하느님께서 밤의 환시 중에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부르시자, “, 여기 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고 그 날 밤에 하느님께서 환시 중에 야곱, 즉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때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야곱아, 야곱아!” 라고 부르십니다. 야곱은 야곱의 인간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야곱은 인간적으로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창세46,3) 3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하느님은 두려워하고 있는 야곱에게 네 아버지와 함께 하던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에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하느님께서는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46,4) 4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의 손이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너와 함께라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하느님께서 가나안땅에서만 함께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애굽으로 갈 때도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애굽에서 너와 함께 있어 큰 민족을 이루고 난 다음에 반드시 너를 데리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네가 죽고 난 다음에도 내가 너와 함께 하여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복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많은 사람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또 축복의 땅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 세상에서 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복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이 죽고 난 다음에도 그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묵시록에 보면 천국은 하느님께서 우리 머리 위에 천막을 치시는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막을 치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느님의 거처지로 삼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하느님나라에서도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함께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모든 곳이 다 하늘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창세46,5-6) 5 그리하여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났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태워 오라고 파라오가 보낸 수레들에 아버지 야곱과 아이들과 아내들을 태웠다. 6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얻은 가축과 재산을 가지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이 함께 들어갔다.

 

야곱이 브엘세바로 갈 때는 애굽에서 온 수레를 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브엘세바에서 애굽으로 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 줄 알고 애굽으로 갈 때는 파라오가 보낸 수레를 타고 갑니다. 우리가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절대 내 뜻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2절에서도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라고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그래서 날마다 야곱과 같이 하느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첫째, 바른 예배(禮拜)를 드릴 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브엘세바로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냥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드리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희생제물을 드렸다는 것은 먼저 감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함께 하셨던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희생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때에 희생제물을 드릴 때 항상 그 제물을 드리는 자가 제물위에 안수하고 드립니다. 이것은 내가 그 제물과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희생제물을 드렸다는 것은 내가 그 제물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무엇이 바른 예배입니까?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면서 나 자신도 하느님께 함께 드려야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음으로 나 자신을 완전히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내가 듣겠습니다. 순종하겠다는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이것이 바른 예배입니다.

우리가 바른 예배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자아(自我)가 살아 있는 예배가 아니라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 바른 예배입니다. 내 뜻이 아닌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말씀입니까? 내생각과 맞지 않은 것, 나의 인간적인 본성과 맞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란 항상 내 뜻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로마서 121-2절에서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육체의 본성으로서는 십자가를 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 육체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미사가 내 자신을 완전히 죽이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없어지고 오직 내 안에 하느님의 말씀만이 살아 있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야곱과 같이 예배를 드린 후에 나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몇 가지 지침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꿈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또 환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꿈과 환상의 차이는 꿈은 잠을 잘 때 꾸는 것이고, 환상은 깨어 있을 때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십니까?

구약성경에서도 (신명기13:2-4) “2 너희 가운데에서 예언자나 환몽가가 나타나 너희에게 표징이나 기적을 예고하고, 3 그가 말한 표징이나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 그들을 섬기자.’ 하고 그가 말하거든, 4 너희는 그 예언자나 환몽가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지침(指針)들이 있습니다.

1) 제일 중요한 지침은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聖經)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면 절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문자로 기록된 성경(聖經)을 주셨습니다. 그 속에서 분명한 하느님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이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는 최고의 지침이라고 하니까 무조건 성경만 들고 나오면 또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도 성경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단들도 대부분 성경을 들고 나옵니다.

그런데 사탄과 이단은 항상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뜻도 바른 성경해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도 매일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주의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전체적으로 바르게 해석해야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2) 내가 지금 속해 있는 공동체(共同體)의 뜻을 잘 살펴야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느님의 뜻을 구한다고 할 때 첫째는 성경, 그 다음에는 기도나 또 내 마음의 평안이나 확신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내 개인적인 고집으로 인한 마음의 평안과 확신을 하느님의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두 번째 요소는 내가 지금 속해 있는 공동체의 뜻을 잘 살펴야합니다. 그래서 로마교회에서 제사의 음식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오로는 로마서1417-1917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18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고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19 그러니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만 아니라 평화(平和)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느님만 기쁘시게 하는 사람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뜻을 구하는 중요한 요소가 평화와 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것이건 그것이 내가 속해 있는 교회의 평화를 깨는 일이면 하느님의 뜻이 아닐 확률이 많습니다. 또 내가 확신과 마음의 평안으로 생각했더라도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덕을 깬다면 하느님의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하느님의 뜻이 도리어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큰 낙심과 실망과 좌절을 준다면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중요한 방법은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사람들의 뜻을 잘 살펴야합니다.

 

3) 중요한 요소는 기도(祈禱)입니다.

기도를 할 때도 항상 내 뜻의 관철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로 기도해야합니다. 얼마든지 내 뜻일 경우에는 꺾을 용의를 가지고 기도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될 때까지 육신의 뜻을 꺾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4) 중요한 요소는 환경(環境)입니다.

하느님의 뜻일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환경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인도하십니다. 물론 이 환경이라는 것도 하느님의 말씀보다 앞서서는 되지 않습니다.

요나가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종해서 다르시스로 가려할 때 마침 다르시스로 가는 배가 왔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느님말씀보다 환경을 따라갔을 때 잘못된 길로 갔습니다. 그래서 환경이라는 것도 하느님의 말씀보다 앞서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요나의 경우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닐 경우 풍랑이 일게 하시고, 큰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게 하셔서 결국 환경으로도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느님은 야곱을 환경을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창세기262절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애굽으로 가지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환경의 차이입니다. 창세기26장에서는 애굽으로 가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애굽으로 가면 요셉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실 때 우리의 환경도 주관해주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구할 때 하느님께서 주신 환경도 잘 살펴야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기도와 내가 속한 공동체와 환경을 통해서 날마다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을 잘 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번째, 순종하려 할 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내 뜻을 하느님의 뜻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공동체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환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이때 내 뜻이 하느님의 뜻과 맞지 않을 때 내 뜻을 포기해야합니다.

아브라함의 위대성은 하느님의 뜻이라면 생명보다 귀한 아들을 포기했습니다. 야곱도 절대 가나안 땅을 떠날 수 없었지만 하느님의 뜻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이 내게 맞는 말씀일 경우에 은혜를 받았다하고 또 아멘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은혜를 받았다고 할 때와 진짜 아멘 해야 할 때가 언제입니까? 그 말씀이 내게 맞지 않을 때, 그 말씀이 나의 생각과 맞지 않을 때, 그 말씀이 내 본성과 맞지 않을 때입니다. 그 말씀이 내 생각과 맞지 않지만 내 뜻을 포기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내가 평생 확신하고 고집해왔던 것이라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꺾고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그럴 때 오늘 본문 아래에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70명이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70명이란 적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7은 완전수이고 10은 충만의 수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숫자가 당장 중요하지 않습니다. 몇 명이라도 하느님의 뜻에 살고 죽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430년이 되면 6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믿는 자를 더해 가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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