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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 강림 대축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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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5-28 조회수520 추천수4 반대(0) 신고

[성령 강림 대축일 가해] 요한 20,19-23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일행 중에 ‘스승’으로 삼아 배울 만한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다름’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나와 100%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서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며 가치관이나 생각이 다르기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라갈 ‘모범’으로든, 나 자신을 성찰하여 잘못을 바로잡게 만드는 ‘반면교사’로든 배울 점이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다름’을 ‘틀림’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배척하지 않는 열린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나와 다른 상대방의 모습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살려주면 우리 삶이 풍요롭고 다채로워집니다. 반면 한 가지 생각과 방식만 강요하는 통제된 사회는 생각을 위축시키고 마음을 주눅들게 하여 서서히 죽어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시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과 마음을 나누며 참된 행복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힘을 합하여 함께 나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오늘은 그런 성령의 활동과 은사에 대해 묵상해보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다양성 안의 일치’로 나아가는 첫번째 단계는 이해와 관심, 사랑의 표현을 통해 상대방의 닫힌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그들의 약함을 책망하지도, 그들의 배신을 단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박해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스승을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잔뜩 움츠러든 제자들이 참된 평화를 누리기를 바라셨을 뿐입니다. ‘나는 너희의 약함과 부족함을 충분히 이해한단다. 그래서 너희를 원망하지도, 비난하거나 단죄하지도 않아. 그저 너희가 나에 대한 믿음을 통해 마음 속 상처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참된 기쁨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란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말 안에는 예수님의 그런 따스한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진심과 사랑이 가득 담긴 숨결을 그들에게 불어넣어주셨고, 그 숨결이 제자들로 하여금 굳게 닫힌 마음을 열게 만들었지요. 매서운 바람은 나그네가 옷깃을 더 단단히 여미게 만들었지만, 따사로운 햇볕은 나그네가 스스로 외투를 벗게 만들었다는 <햇님과 바람>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상처와 두려움으로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은 밖에서 억지로 열 수 없습니다. 문이 안 열린다고 고함을 치고 성질을 부릴수록 그 문에 잠금장치만 더 달릴 뿐이지요. 상대방이 지닌 허물과 잘못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그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진심을 보여주며 그가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그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올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과의 참된 일치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숨을 불어넣으셨다”라고 번역된 부분의 그리스어 원문은 ‘숨을 건네주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숨’이란 ‘목숨’, 즉 당신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 한 번, 부활하신 후에 또 한 번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건네주신 것입니다. 첫번째로 건네주신 생명을 통해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구원의 은총을 누릴 기회를 얻었습니다. 두번째로 건네받은 생명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극복하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여 세상에 복음을 선포할 용기와 힘을 얻게 되었지요. 그것에 더하여 예수님께서는 성령까지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식별하여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세상의 유혹과 시련에 맞서서 끝까지 하느님 뜻을 따르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려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특별한 ‘보호자’를 보내주신 겁니다.

 

성령의 활동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표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불꽃’입니다. 불로 뜨겁게 달군 용광로가 쇳물에 섞인 불순물을 태워 깨끗하게 정화하듯, 우리 마음 안에 자리잡은 욕심과 집착이라는 불순물을 태워 오직 하느님만 찾고 바라는 순수한 존재로 만들어주십니다. 또한 횃불이 어둠을 비추는 것처럼 진리의 빛으로 우리 마음을 비추어 죄를 깨닫고 뉘우쳐 하느님께 돌아가도록 인도해주십니다. 둘째, 성령은 ‘바람’입니다. 때로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세찬 바람으로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은 걱정과 근심들을 쓸어버리기도 하시고, 때로는 위로와 격려라는 잔잔하고 포근한 바람으로 상처 입은 내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시기도 합니다. 이런 성령의 활동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참된 생명력을 회복하게 되지요.

 

성령의 은총과 활동 덕분에 새롭게 변화된 우리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도록 봉사해야 할 책임과 소명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기 전에는 용서가 개인의 ‘선택’이라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알게 되고, 성령의 활동을 통해 하느님과 참된 일치를 이루고 난 뒤에는 용서가 ‘인류 구원’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과 내가 함께 수행해야 할 공적인 ‘소명’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젠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내 편을 들어줄테니 내 맘대로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기 싫은 마음이 들면 나의 그 행동 때문에 그를 구원하지 못하여 마음 아파하실 하느님의 입장을 생각해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옹졸함과 완고함을 이겨내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자녀의 출산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협력하듯, 용서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협력하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받게 될 은총과 축복이 얼마나 클까요?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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