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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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5-29 | 조회수37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 요한 12,24-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받게 될 보상, 즉 천국에서 하느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보상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어마어마 합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들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즉 삶의 기본이 되는 ‘생명’을 잘 유지하면서 세상이 주는 좋은 것들을 누리려고 하는 것인데, 아무리 크고 좋은 보상을 받게 된다한들 내가 죽고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겁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사람은 자기 목숨을 정말 끔찍이도 아낍니다. ‘늙으면 죽어야지요’라고 삶을 초탈한 것처럼 말씀하시던 어르신들도 막상 죽음이 눈 앞에 닥치면 목숨을 잃게될까봐 전전긍긍 하시지요. 그러나 지금 내 목에 붙어 있는 숨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챙기고 아껴봐야 언젠가는 내 목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지요. 하지만 하느님에게서 받아누리는 영원한 생명은 내가 믿음으로 그분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언제까지나 변치 않고 내 안에 머무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정말 소중히 여기며 잘 챙겨야 할 참된 생명은 언젠가 숨이 끊어지면 즉시 나에게서 달아나버릴 ‘일생’이 아니라, 언제나 내 안에 머무르며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해 줄 ‘영생’이어야 한다고, 그 영원한 생명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가 그런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돌아가신 어머니의 위패를 불살라 버리고 천주교 식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는 이유로 즉시 관아로 끌려가 가혹한 문초를 당했지요. 그를 문초하던 전라 감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그 위패를 부모처럼 공경했다면, 땅에 묻는 것은 혹 그렇다 치더라도 어찌 불사를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그것을 부모처럼 공경했다면 어떻게 그것을 불사를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신주에는 제 부모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알기 때문에 불사른 것입니다. 그것을 땅에 묻든 불사르든 먼지로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매를 맞아 죽어도 천주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전라 감사는 후에 윤지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고 합니다.
“형문을 당할 때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791년 12월 8일 윤지충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얼굴로 군중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면서 씩씩하게 나아갔다고 합니다. 그 때 그의 나이 33세였고 “예수, 마리아”를 여러 번 부르며 태연하게 칼을 받았습니다. 9일 만에 친척들이 그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몸이 전혀 상하지 않았고 방금 피를 흘린 것처럼 형구에 묻은 피가 선명했다고 전해집니다.
윤지충 바오로가 죽는 순간까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에서 누릴 한시적인 생명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행복하게 누릴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희망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어떤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끝까지 주님 뜻을 따르면 천국에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존중과 사랑을 받는 복된 존재가 될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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