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정의 여정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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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5-31 | 조회수404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우정의 여정 -주님과 더불어 도반 형제들과의 우정-
오늘은 5월 성모성월 마지막날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날을 경축하는 날이며, 마리아가 석 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니 엘리사벳의 환대가 얼마나 극진했으며 두분간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감동하게 됩니다. 이에 근거하여 반가운 손님이 수도원의 저를 방문했을 때는 저는 주저없이 “아, 오늘은 형제(자매)님의 수도원 방문 축일이네요!”덕담을 드리며 환대하곤 합니다.
나이 70을 넘어 제가 주로 심취하여 읽는 책은 성인들이나 위인들의 평전(評傳)입니다. 요즘 감명깊게 읽은 평전은 금장태 교수의 퇴계평전, 율곡평전, 다산평전이요 이분들의 우정에 정말 감동했고 부러워했습니다. 길다 싶지만 나누고 싶은 분이 율곡과 성혼의 우정이요,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 손암 정약전과의 우정입니다.
1.율곡과 성혼의 우정은 깊어 항상 서로 그리워하며 찾고, 만나면 밤을 새워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43세때(1578) 세모에 눈이 많이 내렸는데, 율곡은 문득 친우 성혼이 보고싶어 소를 타고 눈길을 뚫고 찾아가 밤을 새우고 정담을 나누면서 작별의 아쉬움을 읊기도 하였다.
“한해는 저물고 눈은 산에 가득한데, 들길은 가느다랗게 숲속으로 갈라졌네. 소를 타고 어깨 으스대며 어디로가나? 우계(牛溪;성혼) 냇가 아름다운 사람 그리워서라네.
슬퍼라, 반평생에 이별도 많았으니, 온갖 산 험한 길들 다시금 생각하네. 이야기 끝에 뒤척일제 새벽 닭 울어, 내다보니 창문 가득 서리 달빛 차갑네.”
율곡이 죽었을 때, 성혼은 30년간 율곡과의 우정을 돌아보며 제문에서 율곡의 인물됨을 다음처럼 요약합니다.
“형은 뜻이 크고 원대하며, 학문은 깊고 명석하며, 재주는 영민하고 넉넉하며, 도량은 크고 굳세니, 하늘이 인재를 낳으심이 의도가 있는 것 같았소. 일찍이 큰 도의 근원을 깨쳤으나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고, 스스로 백성을 위한 책임을 맡으면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소. 일을 당해서는 세차게 밀고 나가니 얽히고 설켜 어려운 마디도 그 생각을 얽맬수가 없었으며, 남과 다툼이 없었으니 백성들이나 천박한 사람은 그 도량을 엿볼 수 없었소.”
2.다산 정약용은 둘째 형 손암 정약전이 1816년 6월6일 유배지 흑산도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피맺힌 슬픔을 두 아들에게 처절하게 토로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오호라. 어질면서도 곤궁함이 이와같을 수 있는가. 원통하여 무너지는 가슴을 호소하니 목석도 눈물을 흘리는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외로운 천지 사이에 우리 손암(정약전)선생님만이 나의 지기(知己)였는데, 이제는 그분마저 잃고 말았다. 앞으로는 비록 깨달은 바가 있다하더라도 누구에게 입을 열어보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죽느니만 못하다.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프지 않으랴. 경집(經集) 240책을 새로 장정하여 책상 위에 두었는데 나는 이 저술을 불살라야 한단 말인가.”
정약용 아우의 지기지우(知己之友)였던 형 정약전이 정약용의 <주역사전>에 붙인 서문에서 그 아우의 인물됨에 대한 간결한 서술도 감동적입니다.
“그가 젊어서 성균관에 다닐 적에는 과거시험의 문체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니, 나는 그를 재치가 번뜩이는 재사로 여겼다. 장성하여 규장각에 출입하면서 문학으로 명철한 임금(정조)을 섬기게 되었을 때는 나는 그를 문장과 경학의 선비라고 여겼다. 지방수령으로 나가 행정을 담당하면서는 크고 작은 안팎의 일이 모두 지극한 성과를 이루었기에 나는 그를 재상될만한 그릇이라 여겼다. 만년에 바닷가에 귀양가서 <주역사해>를 지었는데, 나는 처음에는 놀라고 그 다음에는 기뻐하다가 마침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이 꿇어질 뿐만 아니라 그를 어디에 비겨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섬에 유배되어 죽을 날이 멀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세상에 같은 형제가 되어 이 책을 읽고서 이책의 서문을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진실로 유감이 없다. 아아, 그도 또한 아무 유감이 없을 것이다.”
정약용의 저술을 통해 도를 들었으니 이제 죽더라도 아무 유감이 없다는 뜻으로 공자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정말 깊고 아름다운 우정의 형제들입니다. 하늘의 도(道)를 중심으로 날로 깊어졌던 형제간의 깨끗한 우정의 여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늘의 도를 중심으로 하기로는 율곡과 성혼의 우정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마리아와 엘리사벳 간의 우정의 깊이와 아름다움이 확연히 이해됩니다. 오는 제1독서의 스바니야 예언서의 시온은 그대로 우리에 해당됩니다. 삶의 중심인 주 우리 하느님을 확실히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 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모든 이들을 당신 사랑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며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십니다. 바로 스바니야의 아름다운 예언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주님과의 우정에 충실했던 두 영적도반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우정을 깊이할 때 성령충만한 삶이겠습니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고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환호하며 환대하는 엘리사벳입니다. 두분의 영적우정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엿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영적우정과 더불어 태중의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영적우정도 이미 시작됐음을 봅니다. 아, 이런 영적도반이 있다면 그대로 구원이요 태어난 보람이 있는 성공인생입니다. 마리아의 내적 불안과 두려움은 완전 사라지고 그 영혼은 꽃처럼 활짝 피어났을 것입니다.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 참 좋은 영적도반에 영적우정입니다. 예전 우정깊은 선비들이, 또 선사들이 만났을 때 시로 마음을 주고 받듯이 엘리사벳과 마리아 역시 성령에서 샘솟는 시로 서로의 마음을 나눕니다. 엘리사벳의 성령충만한 환대에 응답한 마리아의 노래가 참 절창(絶唱)입니다. 개인 감사고백시로 시작하여 집단감사시로 끝납니다.
역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한 아나뷤의 노래에 속합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가톨릭 교회 신자들이 2000년 이상 저녁 성무일도시 마라아와 함께 부르고 있는 구구절절 희망과 기쁨을 가득 선사하는,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찬미감사가입니다. 첫 부분과 끝 부분만 나눕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습니다....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시온이요 이스라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하시며 더불어 당신 중심으로 살아가는 도반 형제들과의 우정도 날로 깊게 하심으로 우리 모두 성공적 우정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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