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창세기(63) 하느님 나라와 용서(容恕) (창세50,15-21)
이전글 수고하지 않고 얻는 기쁨이란 없습니다. |1|  
다음글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2|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5-31 조회수397 추천수2 반대(0) 신고

 

창세기(63) 23. 5. 31. 수

하느님 나라와 용서(容恕)

(창세50,15-21)

15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보고, “요셉이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모든 악을 되갚을지도 모르지.” 하면서,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다. “아우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분부하셨네. 17 ‘너희는 요셉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너의 형들이 네게 악을 저질렀지만, 제발 형들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니 아우님은 그대 아버지의 하느님의 이 종들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주게.” 요셉은 그들이 자기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듣고 울었다. 18 이어 요셉의 형제들도 직접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아우님의 종들일세.” 19 그러자 요셉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20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1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위로하며 다정하게 이야기하였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의 끝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성경의 처음 책(冊)인 창세기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나무와 같이 한 장씩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전체 숲의 관점에서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나무의 관점에서 창세기를 한 장씩 살펴보았는데, 창세기를 마무리하면서 숲의 관점에서 창세기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이 다스리시고 왕이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되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고, 2장에서는 창조하신 세상 가운데 특별히 에덴동산을 만드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신 이유가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이 하느님 나라인 증거는 선악과(善惡果)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은 왜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드셨느냐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고,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불행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심은 에덴동산이 하느님나라인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선악과는 선악 간에 대한 모든 판단은 하느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한 이유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느님과 같이 되어 인간이 스스로 왕노릇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선악 간의 모든 판단도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이 땅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죄(罪)란 내가 이 세상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 간의 모든 판단을 내가 하겠다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하기 때문에 걱정합니다. 불안합니다.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내가 내 인생의 주인노릇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불행이 왔습니다. 그래서 죄로 인해 부부사이가 갈라지고 형제사아기 갈라지고 인간관계에 폭력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하느님 나라가 되지 않고, 하느님이 진노하시는 세상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느님께서 방주를 통하여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노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홍수 이후에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서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체를 드러냈습니다. 이때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형제들에게 공개하고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었습니다.

아버지 노아도 별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방주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었습니다. 이 일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의 아들 중에서 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를 아는 셈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셈의 후손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도 하느님나라입니다. 이 하느님나라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지셨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하느님나라가 아니라 오직 인간 중심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다시 회복하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느님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3가지 약속들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나라라고 했을 때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주권입니다. 그리고 백성입니다. 그리고 영토입니다.

①먼저 하느님 나라의 주권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창세17,7).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주권자는 하느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왕이 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그들의 왕이 되셔서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셨던 하느님 나라의 주권자는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하느님이 되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는 전능하니 무조건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느님 나라의 주권자가 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②또 이제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15,5).

③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이룰 영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느님 나라를 이룰 땅으로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17,8).

아브라함의 자녀들 가운데서 구원받는 하느님 나라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들 가운데서 이사악만이 구원받는 하느님 나라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이사악의 자녀들 가운데서 형인 에사우가 아니라 아우 야곱입니다.

야곱이 구원받는 하느님 나라의 자녀가 된 이유는 오직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 어떤 선이나 악도 행하기 전에 그를 사랑하셔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받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로마9,11). 그래서 하느님께서 야곱에게도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그대로 하십니다.

첫째는 내가 너의 하느님이 되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의 주권자가 되셔서 그의 모든 삶 가운데서 그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둘째, 너를 통해서 많은 하느님나라의 백성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28,14). 그래서 야곱의 경우에는 그의 12아들이 모두 구원받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많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이루기 위해서 야곱의 자녀들을 애굽으로 가게 하셨습니다(창세46,3).

그리고 셋째, 하느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하느님 나라를 이룰 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28,13). 그래서 본문 앞에 보면 야곱과 죽음과 장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땅에 장사지냈습니다(창세50,13). 본문 뒤에 나오는 요셉도 애굽 땅에서 장사하지 말고, 내 유골을 메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합니다(창세50,25). 그래서 요셉은 애굽에서 입관만 합니다(창세50,26). 그리고 모세가 출애굽 할 때 요셉의 유골을 같이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탈출13,19).

너희들이 있을 곳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가나안땅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합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사악을 부르시고 야곱을 부르시고 우리를 구원받는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신 목적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리들 삶 가운데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이 하느님 나라가 되고, 인간관계가 하느님 나라가 되며, 우리 삶이 하느님 나라가 되고 특히 우

그리고 하느님께 기도했던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내가 이곳에서 누렸던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누리게 하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창세기는 잃어버린 하느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책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은 용서(容恕)입니다. 본문은 구조상 야곱과 요셉의 죽음과 장례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는 가운데서 본문이 있습니다. 마치 샌드위치구조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말하고 뒤에서 하느님 나라를 말하고 중간에 용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50장 15절을 보면 요셉의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이 죽었음을 보고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형제들의 말을 요셉에게 전합니다.

(창세50,17) 17 ‘너희는 요셉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너의 형들이 네게 악을 저질렀지만, 제발 형들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니 아우님은 그대 아버지의 하느님의 이 종들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주게.” 요셉은 그들이 자기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듣고 울었다.

야곱이 죽기 전에 또 하나의 유언을 남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에게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돌아가실 때 자녀들에게 제일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형제간에 화목(和睦)하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혹시 형제간에 다툰 일이 있으면서 서로 용서(容恕)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13장에서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발을 씻겨주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야곱도 죽기 전에 요셉에게 형들을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이 말을 전하면서 “우리를 용서하소서.”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울었습니다. “형님들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이미 용서했습니다. 그러니 보복할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버지와 형님들의 말씀대로 용서합니다.” 는 뜻에서 울었습니다. 이렇게 요셉이 형들을 이미 용서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형들이 요셉에게 앞에서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라고 합니다(18).

(창세50,19) 19 그러자 요셉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악(惡)에 대한 모든 심판은 하느님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나는 용서할 뿐입니다” 는 말입니다. 또 20절을 보면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고 합니다.

그래서 21절에서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위로하며 다정하게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요셉도 마지막에 형들을 이미 다 용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용서가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創世記)를 통해서 이 땅에 선악과를 먹은 죄 때문에 하느님 나라가 깨어졌습니다. 선악과(善惡果)는 선악(善惡) 간의 모든 심판은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선악 간에 심판을 인간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심판합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이 세상은 서로 죽고 죽이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容恕)란 모든 심판을 하느님이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어떻게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용서할 때 비로소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회복됩니다.

선(善)과 악(惡)의 분별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선악 간에 모든 판단은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대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1)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 아담을 죽이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창세기5장에 아담을 구원받는 족보에 맨 위에 이름을 올려주십니까?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아담을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담을 용서해 주신 근거는 하느님께서 가죽 옷을 그에게 입히셨습니다. 이 가죽옷은 그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합니다. 그래서 아담이 죽지 않고 다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느님께서 그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창세6,6). 은혜(恩惠)란 그의 죄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이후에는 이렇게 죄를 덮어주는 자들의 하느님이 되셨습니다(창세9,26).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신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허물과 부족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자였습니다. 이사악은 육신적으로는 태어날 수 없는 자였습니다. 야곱도 속이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은 그들을 향하신 하느님의 일방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야곱은 요셉에게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합니다(17). 에페소서에 보면 우리도 예수를 믿기 전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에페2,1). 그런데 이런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에페2,4) 4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 용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 모든 말씀들은 다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보일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2) 우리가 용서해 주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50장 25절을 보면 요셉은 죽으면서 형제들에게 앞으로 가나안 땅으로 갈 때 “하느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때 여기서 내 유골을 가지고 올라가십시오.”고 합니다. 이렇게 요셉이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앞에서 요셉이 형들을 다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통해서 용서해야 미래에 희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용서(容恕)라는 단어 뜻은 풀어준다 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죄들에 대해서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과거의 감옥에 메일 수밖에 없으며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에 관한 이야기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현재에 내가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미래를 위해서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3)용서하는 것만이 우리 마음의 상처를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용서할 때 내 마음속에 가시가 하나씩 빠져나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게 있는 상처가 이제 내 마음을 찌르는 가시가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게 됩니다.

어느 자녀가 아버지의 유품 가운데 기도(祈禱)수첩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기도 수첩에는 한 편에는 매일 감사의 기도가 있었고, 또 한 편에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니께서 그 분들은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기도 수첩에 매일 그분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적었다고 합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자녀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유산을 남겨주셨습니다. 그것은 감사와 용서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용서를 통해서 우리의 가정이, 우리 삶이, 우리 교회가 하느님 나라가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이로써 창세기를 마칩니다. ~~살롬~

끝으로 여기 굿뉴스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에서

2020년도에 박윤식 에밀리오 형제님께서 창세기를 자세하게 해설해 주셨습니다.

늘 깊은 영성을 가지신 분으로 존경합니다.

저는 개괄적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처해있는 신앙과의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모쪼록 성경을 이해하고 굳은 신앙인으로 거듭나기를 저와 또한 함께 노력합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이제와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