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8주간 금요일]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예수님께서 십자나무에서 다 갚으셨다. (마르11,11-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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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6-02 | 조회수57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연중 제8주간 금요일]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예수님께서 십자나무에서 다 갚으셨다.
(마르11,11-25)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를 받으시면서 11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타니아로 나가셨다. = 성전을 둘러보신 결과 이미 날이 저문(빛이 없음)상태를 빛이신 예수님께서 나가심으로 보여주신다. 빛이 저문 성전이란- 하느님의 뜻, 일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이며, 그래서 성전이신 예수께서 시장하심을 표현하신 것이다.
12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요한4,34) 3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 많은 신앙인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의 듯을 위한 신앙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위해 열심한(무성한) 종교행위에 빠졌기에 그것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 신앙인 것이다. 例: 하느님의 덮으심, 그 진리의 말씀을 뱀의 선악의 말로 먹고, 그 결과로 드러난 자신의 부끄러움(죄)을 가리려고 스스로 열심을 부려 옷을 해 입은 아담의 신앙관이다.
(창세3,7) 7 선악과를 먹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뜻인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주시는 용서, 그 진리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람의 말(법)로 부끄러움(죄)을 스스로 가리려고 자신의 열심(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산다. 그것이 잎(행위)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이며 높은 바벨탑이며 멎진 가파르나움(나를 위한 성전)이다.
13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무화과는 꽃이 열매인 척하는 위선의 모습이다.(꽃이지 열매가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떠난(무시한) 사람의 열심, 행위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들의 사랑실천은 세상과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추구한다.(인간의 의무이며 도리이다) 성경은 그 사랑 실천과 다른 차원, 곧 구원의 열매를 맺는 사랑을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행함, 실행은 킵(마음에 간직하여 지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듯으로 깨달아 거짓 가르침, 그 유혹에 넘어가 빼앗기지 않고 마음 안에 꼭 지키는 그 행함을 말한다. 그래서 내 안에 간직한 그 하느님의 듯을 이웃에게 전해 주는 것, 이웃사랑, 큰 계명이다.
14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 무화과나무의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자신이 받을 수도, 이웃에게 전해줄 수도 없기에 하신 말씀이다.
15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 율법은, 하느님께 ‘깨끗하고 흠 없는 제사 제물을 드려라’ 하셨기에 어린양, 비둘기 등을 사고파는 일이 필요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들 자신의 뜻(욕망)을 위한 제물 드림, 그 무화과 제사였기에 예수께서 그 모든 것을 둘러 엎으셨던 것이다. 성전은 예수님을 뜻한다. 성전의 빛, 제사, 제물, 등잔대, 등 모든 기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16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 성전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뜻을 ‘가르지 말라, 무시하지 말라’는 뜻이다.
17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나의 열심, 충성의 제물을 드릴테니 나의 소원(뜻)을 들어주세요.’ 그것이 하느님과 거래하는 것이 강도이다. 다른 말로 뇌물을 바치는 것이다.
뇌물은 부정한 것~ (시편26,10) 10 그들의 두 손에는 부정이, 그들의 오른손에는 뇌물이 가득합니다.
18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19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 닐(빛)이 저문 성전은 빛이신 예수께서 없으심을 다시 보여 주신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위한 사람들의 얘기, 도덕과 윤리의 가르침으로 행위 신앙을 하게하는, 그래서 사람의 선, 의, 열심을 빛으로 보게 하는 성전, 그 교회는 예수님(빛)께서 없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루가11,33) 33 “아무도 등불을 켜서 숨겨 두거나 *함지 속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함지는 그릇으로 사람을 뜻하며 등경은 교회를 뜻한다.
(에페1,22-23)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20 이른 아침에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 21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스승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 잎만 무성한, 그래서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 맺는, 그 말라버림이다. 곧 하늘의 용서, 평화,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 그리고 그것이 사람 스스로의 열심한(무성한) 행위의 신앙, 성전으로 둘러 엎어져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 자신의 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 곧 ‘우리의 생명의 빛이신 우리 죄의 대속, 그 속죄 제물로 보내신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어라’ 하시는 것이다.
22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 믿음은 신뢰 이다.(크레도- 마음, 심장을 주다) 곧 하느님의 뜻, 말씀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믿고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뜻(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사람의 말(뜻)로 행해버리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것이 안 된다. 오히려 그 사람의 말이 법이 되어 이웃에게 무거운 짐, 산 같은 신앙이 돼버린다,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 산, 지금까지 묵상한 저주받은 행위의 무화과 신앙, 성전이다. 그 높은 산, 곧 열심한 사람의 선, 의, 그 무성한 행위가 높아 보여, 멋있어 보이지만 그것이 사람을 힘들게, 곧 열매인 하늘의 용서, 자유, 안식을 주지 못하는 무거운 짐의 신앙임을 깨닫게 된다면, 그 산, 짐 같은 신앙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속죄 제물로 오신 예수님을 용서, 구원, 생명, 진리로 믿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신다.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 지금까지의 묵상을 통해 우리의 소원, 욕망을 위한 기도가 절대 아님을 알 것이다.
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 용서(容恕), 하느님의 용서로 용서하는 것이다. 나와 나의 원수를 위해, 곧 우리 모두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시다. 그 예수님의 용서를 주는 것, 그 주님의 용서를 적용하여 용서하는 것이 우리의 용서다. 그랬을 때, 우리 도한 하늘 아버지께 그 십자가의 예수님으로 용서를 받는 것이다. 용서는 사람의 언어가 아니다. 하느님의 언어이다. 그렇다고 육신의 용서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해야 한다. 웬수를 용서하려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얼마나 용서를 못하는 부족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구원을 위한 용서도 완전해야 한다. 99%, 안 된다. 100%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죄의 대속을 100% “다 이루었다” 하신 그 주님의 십자가 아래 진심으로 엎드리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최종 목적지이며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하느님 나라의 원리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나의 선, 의, 무성한, 열심한 행위로 가게 되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 된다.
(루가10,15)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잎만(행위) 무성한 무화고 성전, 바벨탑, 높은 산의 신앙이다.
☨ 은총의 천주 성령님! 완전하지 못한 저희 모두를 의탁하나이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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