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9주간 월요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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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6-05 | 조회수353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연중 제9주간 월요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 마르 12,1-12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유명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소작인들을 향한 포도밭 주인의 믿음과 자비를 보게 됩니다. 소작인들이 믿음직스러워서, 믿을만 해서 믿는게 아니라 자비와 사랑 때문에,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뒤통수를 치는 그들을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지요. 주인으로서 당연히 요구해야 할 소출의 일부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냈음에도 그들을 때리고 모욕하며 죽이기까지 하는 악행을 저지르는데도 불구하고, 주인은 소작인들을 향한 믿음을 거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내 아들이야 존중해주겠지’라며 사랑하는 외아들을 그들에게 보냅니다.
정말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해서 보낸게 아닙니다. 악행을 일삼던 그들이 갑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그 아들을 받아들이고 주인의 뜻에 순명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희박한 ‘가능성’만이라도 있다면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뒤늦게나마 상황을 바로잡아 소작인의 지위를 잃지 않도록 한 번이라도 더 기회를 주고 싶어서, ‘제발 내 아들만은 존중해달라’는, ‘구원받을 수 있는 이 마지막 기회만은 저버리지 말고 꼭 잡아달라’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그들에게 아들을 보낸 것이지요.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은 그 아들도 자기 앞에 놓인 가혹하고 슬픈 운명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그들을 구원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이뤄드리고 싶었기에 기꺼이 순명했던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그 간절한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 정신줄을 놓아버린 그들은 결국 그 아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양심과 도리마저 저버린 그들이기에, 이젠 주인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용서와 이해, 사랑과 자비는 그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된 존재, 즉 ‘인간’에게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들은 그 귀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주인’의 모습으로 표상되는 하느님은 당신 은총과 사랑을 아낌없이 베푸시지만, 그것을 허투루 흘려버리시거나 낭비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탐욕에 눈이 멀어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는 소작인들, 그들은 하느님께 받은 은총과 사랑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더 많은 재물을 가지려고 무리수를 두다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이 세상은 주님께서 당신 손으로 창조하신 포도밭이며 우리는 그 포도밭을 잘 관리하여 소출을 내는 소작인일 뿐입니다. 그러니 풍성한 결실을 얻었다고해서 그것을 마치 내 능력과 노력만으로 얻기라도 한 것처럼 혼자 다 가지려고 욕심부려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다 만들어주시고 마련해주신 것들을 풍성하게 잘 누렸다면 당연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또 기쁘게 정당한 ‘사용료’를 내야겠지요.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리한 사용료를 청구하지 않으십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 형제 자매들을 외면하지 않고 따뜻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기회를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즉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내어드려야 할 삶의 소작료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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