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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 중심의 삶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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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3-06-06 조회수498 추천수7 반대(0) 신고

하느님 중심의 삶

-주님의 전사, 분별의 지혜, 영적승리의 삶-

 

 

저는 강론을 묵상할 때는 언제나 염두에 두는 것이 제목입니다. 제목을 정한후 강론을 쓰며 후에 제목을 정정하기도 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하느님 중심의 삶-주님의 전사, 분별의 지혜,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이 강론 제목 역시 참 많이 반복했던 주제입니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음을 새삼, 삶은 반복이란 진리를 깨닫습니다. 단조로운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반복, 날로 내적으로 깊어지는 깨달음의 반복입니다.

 

바로 윗 제목에 그대로 해당되는 분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시고 성인들이고 살아 계신 성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정말 88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활동하시는 모습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정말 하루하루 사적인 삶은 전혀 없고 완전히 공개된 공인의 삶입니다. 쉴 시간이 거의 없이 끊임없이 사람을 만납니다.

 

교황님께서 강조하는 바, 목자로서의 하느님 스타일의 삶입니다. 바로 친밀함(closeness), 온유함(tenderness), 연민(compassion)이 하느님의 스타일이라 하시며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지난 5월27일 교황님은 이탈리아 공영방송 TV에서 여러 사회적 이슈에 대해 세상 상황에 대한 대화와 토론이 있었고, 교황님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습니다. 특히 세계 평화에 관한 말씀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전쟁 그것은 인간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다. 평화와 함께 여러분은 앞으로 나아간다. 조금씩일것이나 얻는 것이 있다. 반면 전쟁과 더불어 너는 모든 것을 잃는다. 모든 것을!(영어 ‘Everthing!’로 강조된 표현이 강력한 느낌이었습니다). 소위 얻는 것들은 잃은 것들뿐이다(gains are losses). 비오 12세 교황은 1939년 세계 2차 대전에 앞서 라디오 메시지에서 말씀하셨다. ‘어느 것도 평화와 함께 할 때는 잃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전쟁과 더불어 사라진다.’”

 

평범하나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이래서 좋은 전쟁보다 나쁜 평화가 백배 낫다합니다. 인간 역사만큼이나 깊은 전쟁의 역사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나 늘 전쟁과 함께 살았던 역설적 인간존재입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쟁입니다. 참으로 무지한 인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전쟁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이 그대로 압축 요약된 전쟁입니다. 

 

교황님의 6월 기도지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황님은 “고문의 공포를 멈추십시오, 인간의 존엄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고문은 과거의 역사가 아닙니다. 안타깝지만 오늘날에도 우리 역사의 일부입니다.” 말씀하시며 고문 폐지를 위해 기도할 것을 청하십니다. 유엔은 6월26일을 세계 고문 희생자 지원의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믿는 이들이 말하는 것은 영적전쟁입니다. 예로부터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자신의 삶을 영적전쟁의 삶이라 규정했고, 자신을 주님의 전사 즉,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라 했고 이것은 제가 즐겨 쓰는 표현입니다. 정말 죽어야 끝나는 하루하루가 영적전쟁의 순교적 삶이고, 우리는 주님의 영적전우에, 영적전우애를 지니게 됩니다. 영적전쟁 승리의 본보기가 바로 순교자들입니다. 순교자 공통 찬미가는 늘 불러도 감동입니다.

 

“하느님 위해 싸워 승리한 용사. 그 몫의 월계관을 씌우신 주여.

 순교자 우러르며 기리는 우리, 죄악의 사슬에서 풀어주소서.”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영적전쟁의 순교적 삶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을 보면서도, “아 예수님의 삶이 참 고달프구나. 끊임없이 계속되는 적대자들의 공격속에 살아가는 영적전쟁의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죽어야 휴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인들은 놀랍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과 기쁨, 평화를 잃지 않았습니다. 바로 어제 성무일도시 계응송이 그 비밀을 알려줍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마음 바른 사람들아 춤추며 기뻐하라.”

바로 지옥같은 세상속에서도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예수님이요 그 후예들인 성인들입니다. 이어 더불어 생각나는 응송입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기쁨이시도다.”

하느님을 나의 힘, 나의 기쁨으로 삼아 영적승리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요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내적평화와 기쁨, 찬미와 감사의 삶이요,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서의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에게 분별의 지혜는 필수입니다. 오늘 주님의 양자택일의 곤궁한 처지에서 그 분별의 천상적 지혜가 빛납니다. 적대자들은 주님을 한껏 부풀린후 양자택일의 답을 요구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이어지는 대화가 참 통쾌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이런 침착하고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지혜로운 처신은 하느님 중심의 철저한 삶에서 기인함을 깨닫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황제의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이들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신의 한 수’ 같은 답변에 이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합니다. 예수님께 크게 한 수, 지혜를 배우는 적대자들입니다. 혹자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말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우선적인 것이 하느님 중심의 삶이요 무엇이 황제의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것인지 스스로 분별하여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금을 바치고 안바치고는 너희들이 각자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황제의 초상이 있는 데나리온에 앞서, 하느님의 모습이 각인된 존엄한 품위의  너희들이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지혜로이 스스로 판단하여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사로서 예수님의 통쾌한 영적승리를, 서로가 사는 ‘상생相生의 승리(win-win)’를 상징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 토빗기는 의인의 시련을 말해줍니다. 토빗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시험대에 오릅니다. 이런 인내의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정화되어 참으로 주님의 전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안나의 도전적 유혹의 말이 토빗에게는 아팠을 것이나 토빗은 이를 너끈히 통과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일면 타당한 듯 보이지만 악마의 간교한 질문입니다. 이와 유사한 물음도 우리에게는 끝이 없어 보입니다. 왜?, 왜?, 왜?, 이렇게 충실히 살아왔는데 하느님은 왜 이런 불행을, 고통의 병고를 주셨느냐는 등 끝없는 질문입니다. 무수한 미사예물의 다양한 지향들을 보면 기도는 간절해질수 뿐이 없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건강하게 미사참례 하면서 예쁘게 살다가 갑작스런 병으로 꿈처럼 떠난, 도저히 실감이 가지 않는 스테파노-비비안나 부부를 생각하면 정말 하느님이 이해불가입니다. 이 또한 믿음의 시험이자 시련입니다. 암투병하던 비비안나 자매는 2월에, 요양원에 있던 스테파노는 3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두분의 연미사를 신심깊은 도미니카 자매님이 봉헌했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에, 주님의 전사로서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지혜와 믿음과 용기로, 온갖 유혹을 통과하여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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