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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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6-07 | 조회수381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 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시편18,29)
성모성월 5월에 이어지는 예수성심성월 6월도 참 아름답습니다. 날로 푸르름이 짙어가는 계절이요 일년중 가장 꽃들이 많이 피어나는 계절이기도합니다. 요즘은 ‘밤꽃’향기가 그윽하고 얼마전에는 ‘메꽃’들을, 엊그제는 올해 처음으로 ‘달맞이꽃’을 발견했고 예전 써놨던 글도 떠올랐습니다.
“꽃같은 만남보다 더 좋은 만남이 있으랴 꼬박 일 년 기다렸다 피어난 꽃이다 꼭 일 년만의 만남이다 밤꽃, 붓꽃, 메꽃, 달맞이꽃... 모든 꽃이 그렇다 꽃같은 반가운 만남이 되려면 일년은 꼬박 기다려야 하는구나.”-2001.5.20.
샛노란 달맞이꽃이 참 청초하고 아름다워 병마病魔와 투쟁중인 분에게도 위로와 치유의 은총을 청하며 사진을 보냈고 반가운 답신도 받았습니다.
“올해 첫 만남의 달맞이꽃! 싱그럽고 상큼하고 예쁩니다. 정신이 번쩍듭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습니다. 신부님, 달맞이꽃 위로와 축복속에 평화롭게 지내겠습니다. 살아 있음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꼭 일년 만에 때되니 피어나는 파스카의 꽃들입니다. 만남의 선물, 만남의 기쁨, 만남의 행복입니다. 어제 피정지도때도 반가운 꽃같은 만남도 잊지 못합니다. 방학동 성당 글로리아 성가대 15명의 오전 피정 미사가 있었습니다. 휴대폰마다 '하늘과 산'의 수도원 로고를 붙여드리고 베네딕도회 수도영성에 대해 말씀드렸고, 함께 행복기도문도 읽었습니다. 미사 강론중 덕담이 생각납니다.
“글로리아 ‘천사’ 성가대같습니다. 모두 흰셔츠를 입으니 천사들 같아 눈이 부십니다. 제일 아름다운 6월 예수성심성월에, 가장 아름다운 요셉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러 온 여러분은 참 행복한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오늘은 방학동 성당 글로리아 성가대의 요셉수도원 방문 축일같습니다.”
역시 젊음은 아름답습니다. 활짝 웃는 젊은 분들의 모습이 꽃처럼 예뻤습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때 꽃처럼 피어나는 모습들입니다. 전례의 궁극적 목적이,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일년만이 아니라 날마다, 하루에도 수차례 성전에서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에 대한 감사기도 일부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희망과 기쁨,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수없이 반복하여 나눈 기도문이지만 늘 새롭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사두가이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의 황당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가상적 질문을 받습니다.
후사가 없이 일곱 형제의 맏이가 죽자 그의 아내는 동생 여섯의 아내가 되었는데 부활후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참 무례하고 불손한, 모욕적인 궤변에 가까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친절히 부활에 대해 귀한 진리를 알려주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중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배우는 부활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사두가이들이 신봉하는 모세오경을 근거로 살아 계신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살았던 이들이 부활의 삶을 산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 이름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러니 사람눈에 죽은 형제자매들이지 주님을 믿다가 죽은 이들은 하느님 안에서 다 살아 있음을 믿게 됩니다. 참으로 이런 살아 계신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참희망이자 참기쁨임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이런 살아 계신 주님을 믿고 만나는 이들에게 절망이나 원망, 실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토빗서의 토빗의 살아 계신 주님을 향한 간절하고 진솔한 참회의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는 말도 있듯이 아내 안나에게 시달리다 탄식하며 울다가 바치기 시작한 토빗의 기도 시작부분이 참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시작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토빗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확고한지 깨닫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은 모두 의롭고,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볼 때 정말 너무나 부끄러워 저절로 참회의 기도를 바치는 토빗입니다. 토빗의 입에 담아 참회기도를 바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토빗에 이어 불운했던 라구엘의 딸 사라에 대한 일화가 계속됩니다.
사라역시 최측근인 아버지의 여종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심한 모욕을 듣자 슬픔이 북바쳐 울면서 기도를 바칩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생략되었지만 ‘사라의 기도’도 ‘토빗의 기도’만큼이나 감동적입니다. 역시 사라의 첫 기도 말마디가 하느님 중심의 찬미와 감사의 삶을 확고히 해줍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당신께서 하신 모든 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하느님 찬미의 사랑으로, 찬미의 기쁨으로, 찬미의 행복으로, 찬미의 맛으로 살아 갔던 ‘찬미의 백성들’ 이스라엘처럼, 수도자는 물론 믿는 우리들 역시 찬미의 사랑,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들’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합니다. 주님의 응답을 받으니 해피엔드로 끝나는 토빗과 사라의 기도입니다.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
만남중의 만남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평생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죽는 그날까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계속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시편25,1).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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