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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찬미받으소서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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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3-06-08 조회수431 추천수6 반대(1) 신고

찬미받으소서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

 

 

 

예전 신자분과 주고 받은 문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수사님은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여기서 사느냐?”는 물음입니다. 신학교때 동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저를 “수사”로 부르는 것을 좋아해 여전히 수사라 부르고, 또 많은 분들도 수사라 부르는 것이 좋다며 수사로 부릅니다. 이 질문을 받으면 대답전에 묻습니다.

 

“형제님은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삽니까?”

거의 대부분 웃으며 대답을 못합니다. 하나 덧붙여 묻는 질문입니다.

“형제님의 삶은 선물입니까? 혹은 짐입니까? 형제님의 아내는 선물입니까? 혹은 짐입니까? 형제님의 자녀들은 선물입니까? 혹은 짐입니까?”

역시 웃기만 할뿐 선뜻 대답하지 못합니다. 결론으로 저는 주저없이 답합니다.

 

“저는 하느님의 찬미의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삽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저뿐 아니라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여기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수도자들의 공통적 답변일 것입니다. 저에게 삶은 두말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찬미의 맛으로,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갈 때 삶은 하느님의 선물로 변합니다.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의 삶에서 샘솟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평생 하느님 찬미의 기도를 주업으로하여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이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주일마다 아침 1시간 동안 노래로 바치는 “주님을 찬미하라”로 시작하여 “주님을 찬미하라”로 끝나는 긴 다니엘의 찬미가는 사랑의 찬미, 기쁨의 찬미가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게 합니다. 아주 오래전 써놨던 “들꽃같은 삶”이란 시도 생각이 납니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살아있음이 기쁨이요 행복이다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이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

쓰레기 내지 않고

물주지 않아도, 거름주지 않아도, 약치지 않아도

가난한 땅에서도 무리를 이루어 잘도 자란다

작고 수수하나 한결같이 맑고 곱다

탈속의 초연한 아름다움이다

최소한의 자리, 양분, 소비의 자발적 가난이지만

하늘 바람에 유유히 휘날리는 샛노란 별무리 고들빼기 꽃들

참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이다

가난한 부자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2001.5.20.

 

무려 22년전 시를 오늘 인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찬미받으소서-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입니다. 하느님 찬미에서는 천주교, 동방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이슬람, 유대교가 일치할 것입니다. 개신교 목사님들이나 신자들이 수도원에 와서 압도되어 감동에 젖게 하는 것이 바로 저녁 성무일도시 하느님 찬미의 노래입니다. 

 

“찬미받으소서”, 바로 모두가 공감하고 감동하는 이젠 고전의 반열에 속하는 2015년6월16일 반포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번째 회칙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리의 빛을 발하는 고전입니다. “찬미받으소서” 책자 뒷표지의 소개글입니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아름다운 찬가에서 우리의 공동의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찬미받으소서” 회칙은 아주 구체적으로 현실적인 처방을 제시하는 영성서적입니다. 결론부분은 생태교육과 영성에 대한 금과옥조의 실제적 처방입니다. 새로운 생활양식을 향하여, 인류와 환경 사이의 계약에 대해 교육하기, 생태적 회개등, 참으로 백척간두의 위험에 처해 있는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인류와 세상 피조물이 살아남기 위한 생태적 회개가, 생태적 혁명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이 참 고무적이요 좋습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네.”(2티모1,10). 바로 오늘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오늘 복음이 특히 그러합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 는 율법학자의 물음에 둘째까지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에 화답하여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님은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며 그의 영성을 인정하십니다. 아, 이제 이웃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 모든 피조물까지 포함해야할 절체절명의 기후위기의 시대입니다. 여기에 결정적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 수도원의 5마리 반려견들일 것입니다. 저렇게 사람을 따르는 개처럼 우리도 주님의 따라야 함을 배웁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찬미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하느님 찬미는 한결같고 열렬할 수 뿐이 없고 영육의 건강, 특히 정신건강에 하느님 찬미보다 더 좋은 명약은, 영약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은 날로 확고해지면서 공동체의 일치는 물론 이웃 형제들과의 사랑도 저절로 함께 깊어질 것입니다.

 

물론 자연 피조물도 이웃 사랑에 포함됩니다. 참으로 사람 형제를 비롯하여 피조물 형제들까지 망라한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을 입증합니다. 제가 “찬미받으소서” 강론 제목을 택한 것은 바로 제1독서에서 토빗의 아들 토비야와 라구엘의 딸 사라가 혼인하여 합방하기전 바친 기도문에서입니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대대로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하늘과 당신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멘. 아멘.”

 

기도문이 참 멋지고 아름답고 적절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혼부부가 첫날밤 바칠 기도문에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찬미의 삶이 이웃사랑의 기초가 됨을 깨닫고 배웁니다. 어제 병원에 다녀오다 악취에 주변을 살펴보니 개천에서 나는 냄새였습니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으니 맑게 흐르며 찬미가를 부르던 시냇물이 말라 버린 것이며 웅덩이에 고인 썩은물에서 나는 냄새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와 시편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우리 모두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찬미의 강”으로 살도록 해줍니다. 이를 요약한 제 좌우명 기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다음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찬미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찬미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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