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주님만 바라고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
네 앞길 주게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주시리라."(시편37;3.5)
어제부터 마태복음 산상설교의 시작입니다. 늘 읽어도 새롭고 감동적입니다. 어제 주제는 진복팔단의 참행복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성덕의 여정”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결국은 살아야 할 성덕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바로 참행복의 진복팔단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참행복을 그대로 사셨던 예수님은 참행복의 중심中心이자 원조元祖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참행복을 살 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할 때 저절로 참행복을 살게 된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자발적 기쁨으로 참행복의 진복팔단을 사랑하여 자발적 기쁨으로 살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성 베네딕도입니다. 성인은 그의 규칙서에서 두차례 이를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성규4,21)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72,11-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할 때 참행복의 실천이요 성인입니다. 참행복을 살았던 바오로가 예수님의 정체를 감동깊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
하느님의 “예스맨(yes-man)”이자 “아멘”이신 예수님을 닮아 참행복을 살 때 우리 역시 하느님의 “예스맨”이 “아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을 세례명으로 해도 기막히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행복의 진복팔단에 이어지는 소금과 빛의 비유가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여 진복팔단의 참행복을 살 때 저절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역시 예수님의 삶자체가 세상의 소금이자 빛의 삶이셨습니다. 세상의 원소금, 원빛이 예수님이기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때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 일치의 삶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세상의 소금!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이렇게 제 삶의 자리에서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을 떠난, 세상과 격리된 소금이라면 무의미합니다. 세상의 소금, 바로 선교가 우리의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나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세상 이웃의 소금이 되는 삶입니다.
그러니 부패로 변질變質, 변절變節됨이 없이 한결같이 제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것입니다. 소금이 제맛을 잃듯, 제맛을 잃은 우리 삶이라면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늘 제맛을 지닐 때 비로소 아름답고 향기로운 매력적인 삶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늘 제맛을 지님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제맛을 지니고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썩었다 해도 곳곳에 이런 세상의 소금같은 성인들이 있어 유지되고 지탱되는 세상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이런 성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아주는, 세상을 맛나게 하는 세상의 소금같은 사람들입니다. 소금은 녹아 세상속에 녹아 사라져 보이지 않지만 세상은 부패되지 않고 제맛을 지니니 얼마나 멋지고 겸손한 삶인지요!
“맛이 갔다!”
음식뿐 아니라 변질된 사람을 빗댄 말이기도 합니다.
“음식은 맛이가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사람은 맛이가도 버릴 수 없으니 참 난감합니다.”
언젠가 들은 말인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 말씀하십니다. 부패의 변질을 막아주면서 세상의 소금으로, 제맛을 지니고 살게 하는 것이 바로 끊임없는 기도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세상의 소금같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세상의 빛과 같은 개인도 공동체도 있습니다. 세상의 빛! 역시 우리의 신원이며 선교는 우리의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빛이지 세상을 떠난 빛은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함께 있으면 분위기가 생생히 살아나고 환해지고 유쾌해지는 느낌이니 이런 이들이 그대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인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이는 분위기를 무겁게 불편하게 하고 어둡게 하는 이들도 있으니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이 결핍된 이들입니다.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도 똑같습니다. 과연 내 몸담고 있는 가정공동체는, 수도공동체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자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과연 내 몸담고 있는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하며 부패로 변질되지 않고 제맛을 잃지 않고 있는가?”
제가 자주 성찰하는 주제입니다. 부패로 변질됨이 없이 늘 제맛을 지니고 살고자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이요 제가 매일 쓰는 강론입니다. 바로 참행복을 실천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정말 변질되지 않고 제맛, 제빛을 내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기위한 유일한 처방이자 대책은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함으로 날로 깊어지는 일치와 더불어 닮아가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인의 삶이요 이것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이며 보람일 것입니다. 그 좋은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입니다.
성인의 파란만장한 짧은 삶이 불꽃처럼 강열하고 아름답습니다. 정말 세상의 소금과 빛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한결같이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우구스티누스 참사회에 입회하여 생활했으나 소박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삶에 매료되어 옮겼고, 이어 모로코에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심한 병으로 포르투칼로 귀국길에 올라 회항중 배는 심한 폭풍우로 항로에서 벗어나 시칠리아에 당도합니다.
성 안토니오는 토스카나에 도착하여 그곳 수도원에 들어갔고 후에 로마냐의 포를리에서 살게 됩니다. 바로 거기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의 결정적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됩니다. 안토니오의 됨됨이를 파악한 성 프란치스코는 1224년 프란치스코회원들의 교육을 안토니오에게 위임합니다.
이후 안토니오는 설교가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당대 그를 능가할 설교가는 없었으며 어느 학자는 성인을 ‘그리스도교의 자랑’이라 했으며 교황궁에서 한 설교는 ‘성경의 보물창고’라는 칭송도 받았습니다. 어느 분은 안토니오를 ‘이단자를 부수는 망치’, ‘살아 있는 언약의 궤’등으로 불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리미니란 곳에서 영감을 받아 바다 물고기들에게 설교했고, 물고기들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고 하니 정말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답습니다.
성인은 만35세 짧은 나이에 병사한후 선종한 다음해 1232년 5월 30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1946년에는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교회학자로 선언됩니다. 특히 안토니오는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유명합니다.
정말 믿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얼마나 열렬히 한결같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했느냐, 그래서 참행복의 진복팔단을 실천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잘 살았느냐의 “삶의 질”입니다. 주님의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 모두 주님과의 일치를 깊게 하시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