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일꾼, 주님의 전사, 자비의 전사-
계속되는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입니다. 오늘은 6개 대당명제중 5번째 대당명제로 폭력을 “포기하여라(보복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짧지만 강력합니다. 예수님의 힘찬 말씀을 들어보세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빰마져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어 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이런이야 말로, 하느님의 일꾼의 자격이 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자비와 지혜의 하느님을 닮은, 예수님을 닮은 성인입니다.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입니다. 이런 이들 앞에서 악은 저절로 무장해제되어 무력해집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악은 선의 결핍이란 말도 있습니다. 치유를 필요로하는 상처받은 선이 악일수 있습니다. 또 내눈에 악인이지 타인이나 하느님 눈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라 단정짓지 말아야 합니다. 악인에게도 우리가 모르는 피치 못할 사연이나 원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악인에 맞서지 않는 것은 악에 대한 비굴하거나 비겁한 무저항이 아닙니다. 악인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거룩한 사랑을 지녔기에 두려움의 어둠이 걷힌 내면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악인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지 않습니다. 결코 악을 이길수 없습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보복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으며 악마가 쾌재를 부릅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미풍을 미풍으로 끝내는 참으로 지혜로운 이들입니다. 참으로 자비에 저절로 따라오는 지혜와 용기입니다. 이런 거룩한 행위는 무저항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의 저항입니다. 이의 전형적 인물이 누구보다 예수님을 닮았다는 힌두의 성자 간디입니다. 이런 이들이 참으로 용기있는 사람들이요 자비와 지혜의 내공이 깊은 내적힘을 지닌 자들입니다. 참된 자기 존엄성과 품위를 지키는 자들이요 상대방의 존엄성과 품위를 지켜주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악에 대한 처방은 거룩한 사랑의 저항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보복의 악순환을, 폭력의 악순환을 단(斷), 끊을 수 있습니다. 이런이들은 결코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를 낸다면 사감이 걷힌 의노일 것이나 이는 일종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지극한 인내의 대가요 달인들입니다. 참으로 자비롭고 지혜롭기가 하느님을 닮은 이들입니다.
참으로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들이요 내적 부요의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갈 때, 즉 하닮의 여정에 충실할 때 가능하겠습니다. 이런 거룩한 사랑을 지니려는 거룩한 청정욕은 너무 좋습니다. 욕심이 다 나쁜 것이 아니니 이런 거룩한 사랑의 성인이 되려는 청정욕은 정말 좋습니다.
역시 제가 늘 강조하는 영적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지칠줄 모르는 성인이 되려는 좋은 열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영적승리의 삶에, 평생 영적전투의 삶에 지칠줄 모르는 샘솟는 좋은 열정은 필수전제조건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좋은 열정에 있습니다. 역시 정신건강, 영혼건강, 마음건강에도 필수 전제조건이 이런 지칠줄 모르는 샘솟는 순수한, 좋은 열정입니다. 이런 이들이야 말로 매력적인, 아름다운 영혼들입니다.
모든 수행이 이런 열정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성인의 되려는 선택이요 이에 따른 한결같은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이렇게 선택-훈련-습관의 시스템안에서 하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이런 거룩한 사랑의 저항이 가능합니다. 악에 대한 궁극의 영적승리가 가능합니다. 이의 결정적 표지와 답이 십자가의 예수님,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파스카 주님의 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구체적 수행으로 끊임없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요 회개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로 늘 맑게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인내의 정주의 산으로, 안으로는 늘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깨어 흐르는 찬미의 강, 사랑의 강, 용서의 강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산과 강의 영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결코 값싼 은총은, 값싼 구원은 없습니다. 은총과 더불어 분투의 노력을 다해 비폭력의 삶을 사는 이들, 거룩한 사랑의 실천으로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버려 악을 무력화하는 이들이야 말로 탁월한 의로움의 사람들이요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사는 이들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참으로 자랑스런 영적승리의 표상, 인간승리의 표상이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라며, 또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이 날이라며 다음과 같이 하느님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강조합니다.
즉 주님의 전사, 자비의 전사, 지혜의 전사로 살아 온, 초지일관, 시종여일의 삶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우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요 부단한 자극이 되고 더욱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스문장은 하나랍니다. 폭포수같이, 또 단숨에 읽히는 내용 전부를 인용합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또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우리는 늘 그렇게 합니다.”
늘 그렇게 한결같이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아 온 바오로 사도입니다. 불가사의입니다. 도대체 이런 백절불굴의 성인을 본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철갑으로 완전무장한 바오로,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영적 삶의 대원칙으로 삼아 끊임없이 이렇게 살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의 본질적 깊이의 영적 삶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비워갈 때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1.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진실합니다.
2.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3.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4.벌을 받은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5.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6.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7.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의 일곱의 역설적 진리의 삶을 통해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사는 것"이란 사도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그대로 주님의 빛나는 현존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참으로 진리가, 하느님의 은총이 바오로를 자유롭게,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로 살게 했음을 봅니다.
여기에 한 분 추가하고 싶습니다.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의무기념으로 미사봉헌하는 10-11세기 성 로무알도 아빠스입니다. 가말돌리회 창립자로 베네딕도 규칙을 근간으로 하여 공주생활과 은거생활의 두 공동체를 동시에 하나로 품은 수도생활을 시작한 분입니다. 이 수도성인도 지칠줄 모르는 좋은 열정으로 하닮의 여정에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 시종여일한 삶을,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닮의 여정중인 우리 모두를 날로 당신 자비의 전사, 지혜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