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 (루카1,57~66.80) | |||
---|---|---|---|---|
이전글 | 세상은 보는대로 존재한다. |1| | |||
다음글 | 말속에 향기와 사랑이 |1| | |||
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6-24 | 조회수30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 히브리어 콜(소리)은 *코프(파괴하고 다시 세우다)와 *라메드(교훈하다. 가르치다)로 되어있다. 파괴하고 다시 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서 알게 하는 것이 콜-소리, 그 소리로 깨달아 옛것을 부수고, 버리고(죽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루카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 히브리인들은 아기 이름을 조상들의 이름 중에서 선택한다(조상의 뜻을 이어 받겠다는 의미)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 요한은 하느님께서 주신 이름으로 옛 이름(것)은 안된다는 의미.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 옛것을 버리자 입이 열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할, 큰 인물을 아들로 주시겠다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자~ (루가1,20)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 믿음이 없는 옛 입을 막으셨던 것이죠.
자신이 믿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입이 열리자, (루가1,67-69) 67 아기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 인간의 구원을 위해 神이 찾아오시는 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 이 아기,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소리가 될 것입니다.
(요한1,23.29)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어떻게 없애시나? 세상의 모든 죄를 다 받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이사53,4-7)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 그렇듯,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 인간이 자신들의 희생, 빵을 드리는 것이 아닌 하늘의 희생 제물, 빵을 받아 먹는 것입니다.
(요한6,48.51)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 사람(피조물)은 하느님(창조주)만으로 존재일 수 있는 것이지요. 하늘의 빵을 먹어야 하늘의 생명으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탈출16,12)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6,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 하늘의 빵을 파스카의 고기로 먹기 위한 모든 행위는 저녁(어둠)의 양식인 것이고 그 옛것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 피로 맺은 새 계약으로 먹으면 아침(빛)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희생, 열성, 의로움이 아닌 하늘의 희생, 열심인 십자가의 의로움을 받아 그 의로움으로 사는 곳이 하느님 나라죠. 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소리입니다.
(히브10,9-10)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 소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복음(루카1,57~66.80)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59~60)
'할례식에 갔다가'로 번역된 '페리테메인'(peritemein; to circumcise)의 원형 '페리템노'(peritemno)는 원래 '둘레를 자르다', '칼자국을 내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할례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자 성기의 포피를 잘라내는 할례식을 통해 그들이 이방인들과 구별된 백성임을 드러냈고(1사무17,26), 또한 하느님과의 계약의 표징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임을 인정받았다(창세17,11).
그리고 이 할례는 출생 후 여드레째 되는 날에 시행했는데, 그 이유는 아이를 출산한 여자가 이레 동안 부정했듯이(레위12,2) 그 아이도 부정한 것으로 여겨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통해 이레 동안의 부정을 깨끗히 씻어 버리고, 하느님의 약속에 힘입어 새롭게 태어남을 상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갔다가'로 번역된 '엘톤'(elthon; came)은 '오다'의 뜻을 가진 '에르코마이' (erchomai)의 부정(不定) 과거 3인칭 복수형으로서 '그들이 왔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들은' 루카 복음 1장 59절 후반절에서 아기의 이름까지 지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아 즈카르야의 가까운 친척들이거나 아웃들로 여겨진다. 원래 자녀의 할례는 가장(家長)에 의해 시행되는데, 친척들과 이웃들이 함께 참석하여 공개적인 의식으로 치러진다.
가까운 친척들과 이웃들은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로 짓고자 한다. 여기서 '부르려 하였다'로 번역된 '에칼룬'(ekaloun; they called; they were giong to name)은 '부르다', '이름하다' 등의 뜻을 가진 '칼레오'(kaleo)의 미완료 과거로서 이름을 짓고자 했던 자들의 강한 의지를 나타낸다. 즉 행동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가 사용된 것은 그들이 그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로 부르고자 계속 고집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러한 고집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기의 이름을 짓던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 풍습과 이름을 중요시했던 유다인들의 사상적 배경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아기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척들과 이웃의 주장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따를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엘리사벳은 루카 복음 1장 13절의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는 천사의 예언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에 따라 자식의 이름을 짓는 사회적 통념에도 불구하고, 자신있게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가 아닌 '요한'으로 주장할 수 있었다. 엘리사벳의 이러한 담대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요한'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인의 이름으로는 흔한 것인데(1역대12,5.13), '주님의 은총', '주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의 히브리어 '요하난'(yohanan)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따라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늙어서 수태할 수 없었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게 부어주신 하느님의 은총과, 세례자 요한을 메시야의 길을 미리 예비하는 자로 세우셔서 사람들을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하느님 은총의 통로가 되었기에, '요한'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큰 은총이 잘 표현되고 있는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