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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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6-24 | 조회수32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루카 1,57-66.80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제가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컬투 작명소’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여 애착이 가는 물건 혹은 대상이 자기 삶에 특별한 의미가 되도록 기념이 될만한 ‘이름’을 붙여달라고 청취자들이 사연을 보내면, 그 사연을 들은 이들이 적당한 이름들을 추천하고 방청객들이 투표를 통해 그 중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이름을 골라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대상은 특별한 이름을 갖게 됨으로써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가 됩니다. 하물며 물건이 그럴진데 사람은 더 그렇겠지요.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와 나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또한 그 사람을 나 자신처럼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저희 부모님이 저에게 ‘승수’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이름으로 계속 불리움으로써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무려 하느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신 특별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세례자 성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는 인간적인 ‘관습’과 하느님 뜻에 대한 ‘무지’ 때문에 하마터면 그 소중한 이름을 잃어버릴 뻔 했습니다. 그 가문의 어른들이 유대인들의 오랜 전통에 따라 아기를 가문의 이름인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한 것이지요. 그 이름을 받아들였다면 아기는 구세주의 오심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가 되었을 것이고, 높은 지위와 넉넉한 재물도 보장되었을 겁니다. 자기 자식이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고 재정적으로도 풍족하게 살아간다면, 그건 그의 부모에게 큰 기쁨이며 많은 부모들이 바라는 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아기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달랐습니다.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는 가문의 이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바람이 담긴 ‘요한’이라는 이름을 택했습니다. 부디 자기 아들만은 부족한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전철을 밟지 않고, 그 이름에 담긴 의미대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굳게 믿으며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순명의 삶을 살기를 바랬던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특별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바로 ‘세례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받은 그 이름의 성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믿음과 실천으로 하느님 뜻에 순명하며 살았는지, 어떤 용기와 희생으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사랑을 드러냈는지 알고 닮기 위해 노력하는지요? 내가 받은 그 이름에 하느님의 어떤 심오한 뜻이 담겨있으며, 그 뜻이 내 삶 속에서 드러나도록 하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사는지요? 소중하고 특별한 이름을 받았다면, 그 이름에 먹칠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이 나에게 부끄러운 일이 되지 않도록 ‘이름 값’을 제대로 하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그 뜻에 맞게 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법에 휘둘리지 말고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자상하고 따스한 사랑의 손길로 우리를 보살펴 주실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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