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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두가 “신(神)의 한 수(手)”이다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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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3-06-24 조회수383 추천수7 반대(0) 신고

모두가 “신(神)의 한 수(手)”이다

-성소, 주님과의 관계, 훈련-

 

 

 

참 사람되기 힘듭니다. 가장 힘든 것이 참사람이 참내가 되는 것입니다. 평생공부가 참내가 되는 공부입니다. 한마디로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인생 폐인이, 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은 참나의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나이들어도 순수와 놀라움의 감각을 잃지 말아야 하고 시적 감성을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

 

시편 8장은 온통 하느님과 인간, 우주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심으로 가득합니다. 교황님도 얼마전 천문학자들 모임에서 결코 놀라움의 감각을 잃지 말라 강조하셨습니다. 역시 여기 수도원에서 26년전 쓴 “아침”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아침의 자연은

늘 새롭다 놀랍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밤의 침묵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었느냐?” 가 아닌

“아침을 보았느냐?”

“아침을 들었느냐?”

인사할 수는 없을까

 

똑같은 사람, 환경, 말과 글도

살아 있으면

침묵의 밤이 있으면

늘 새로운 놀라운 좋은 아침일 수 있겠다’-1997.8.16

 

배밭사이 배봉지 흰별들 가득 달린 별밭사이를 걸을 때마다 놀라움, 새로움의 감각을, 원초의 순수를 회복하려 노력합니다.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세상도, 수도원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내적성장과 성숙을 통해 참나가 되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한국적 수도생활의 토착화로 시작된 단순소박한 수도승 생활이었습니다. 모두가 자리에 앉는 좌식이었고 참으로 최소한의 필요로 시작한 편안한 고향집같은 수도원 환경이었습니다. 이젠 수도원 성전내 수도자의 자리도 어제 저녁기도부터는 의자에 앉는 좌석으로 바뀌었습니다. 1987년 수도원 개원후 36만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과거 넓은 공간의 성전은 이제 의자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런 시대적 추세라지만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젠 큰 절만 하는 것만 남았네요.”

“그것도 언제 없어질지 모릅니다.”

 

원장과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아마 머지 않아 성전에 들어오고 나갈 때 제대 앞에 큰절하는 관행도 사라질 것입니다. 수도원의 쓰레기들은 또 얼마나 많아졌는지요! 이런 추세라면 세상이 온통 쓰레기장이 될 것 같습니다. 공기도 사람도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수도원 앞에는 거대한 별내신도시가 들어서 상전벽해가 되었고 그나마 원형의 자연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수도원뿐입니다. 며칠전 읽은 탈성장, “포스트 자본주의를 고민하자”라는 제하의 글 일부를 인용합니다.

 

“녹색성장, 지속 가능한 성장만이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하기 십상이죠. 하지만 지속가능한 성장은 환상일뿐입니다. 수백년간 세계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자본주의가 추구해온 성장지상주의 탓에 인류와 지구 생태계가 존폐 기로에 몰렸습니다. 탈성장이 유일한 해법이나 자본주의하에서 탈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인류가 계속 살아남으려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참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연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를 벗어날 수 있을지, 단순소박한 삶의 양식을 어떻게 지녀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으로 영적혁명이, 내적혁명이, 의식의 변화가 절박한 시절입니다. 병자들이, 특히 정신질환자들이 넘쳐 납니다. 

 

어제 공부하며 깨달은 소시오패스와 사이코패스 정신 장애자들입니다. 일종의 괴물같은 인간입니다. 둘다 공통적 특징은 양심이 없다는 것이며 공감, 배려, 존중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추세라면 더욱 늘어날 이런 정신 장애자들입니다.

 

“사이코패스는 심신미약이나 심신상실이 아닙니다. 인지능력 자체가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양심이 없어서입니다. 이같은 기질은 타고나더라도 어릴 때 부모의 훈육등을 통해 충분히 누를 수 있습니다. 조현병은 치료하면 나아질 수 있으니까 사회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약물치료를 중단할 경우 재발률이 90%에 달하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반면 사이코패스는 치료가 잘 안됩니다. 타고난 부분이 나쁜 데다 입원해도 큰 의미가 없어서 교도소에 수감하는 게 낫습니다.”

 

아, 정말 사람되기 힘든 세상입니다. 얼핏 분별이 안되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에 속한 이들이 공동체의 지도자나 가정의 부모가, 배우자가 된다 할 때 그 피해는 얼마나 크겠는지요. 저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참으로 온전한 참사람으로 살기위해 신앙생활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을 떠나 길을, 나를 잃어 버리면 누구나 괴물이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제는 미사중 면면을 살펴보며 한분한분이 영적전쟁에 백전노장의 믿음의 용사요 신의 한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신의 한 수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 세례자 요한이 그러하고 여기 수도자들이 그러하고 엊그제부터 저에게 물리치료를 해준, 20년간 수도원을 노동으로 도운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믿음의 사람, 박응표 세례자 요한 형제가 그러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의 한수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나의 성인으로 살기위해 평생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이 되어 시종일관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세례자 요한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분은 예수님 말고는 유일합니다.

 

첫째, 성소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연적 무명의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불림 받은 신의 한수같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오늘 제1독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는 성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은 물론 나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정말 이런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래야 정체성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나의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바로 이런 주님의 종이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신원이자 정체성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맞습니다. 이래야 자존감 높은 정신 건강, 영혼 건강의 삶에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존엄한 품위의 삶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139장도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인간존재임을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때로 삶의 허무와 허망함에 좌절도 있겠지만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께 두고 곧장 일어나 주님을 붙잡을 것입니다.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음 말씀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우리 모두 주님께 불림받은 신의 한수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대신 내 이름을 넣어 좌우명처럼 늘 되뇌이기 바랍니다. 

 

둘째,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 없는 성 요한 세례자 상상할 수 없듯이, 예수님 없는 우리 상상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인 예수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여 평생 닮아갈 때 참나의 성인이 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인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을 떠나버리면 참나의 상실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깊어가는 관계와 더불어 온유와 겸손입니다. 다음 제2독서중 바오로를 통해 소개되는 성 요한 세례자의 겸손한 고백은 나의 고백이 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처럼 주님 앞에서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겸손과 순수, 지혜의 은총이요, 주님 앞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 책임을 다하며 제대로 온전한 삶을 살아갈 때 정신건강, 영혼건강의 삶이겠습니다. 영혼건강, 정신건강의 명약 넷이 희망, 기쁨, 감사, 평화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훈련입니다.

도대체 영성생활에 훈련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진인사대천명입니다. 날마다 한결같은 영적훈련으로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의 은총도 함께갑니다. 정신건강, 영혼건강을 위해 한결같은 치열한 영적훈련은 필수입니다. 이래야 괴물이나 폐인이 되지 않습니다. 유비무환, 평상시 영적훈련을 통한 예방이 처방보다 백배 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탄생한 요한 세례자 작명 과정을 통한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의 영적훈련이 참 인상적입니다. 잠시의 불신으로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 인내와 기다림의 영적 훈련중에 귀는 활짝 열려 경청의 사람, 관상의 사람으로 변모했음을 봅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는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자 감사에 벅차 하느님을 찬비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성무일도시 끝무렵에 바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경청도 순종도 찬미도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이런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모를 그대로 보고 배웠을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어떻게 얻는 아들인데, 참으로 한결같은 영적훈련의 모범된 삶을 통해 성 요한 세례자를 교육했을 것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광야는 그대로 영적훈련장이였음을 봅니다.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 것을 기초로 삼아 영적훈련에 전념했기에 굳센 정신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불림받은 신의 한수같은 고귀한 품위의 존재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은 참나의 삶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파견되었습니다."(사도13,26).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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