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탄생이야기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받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그 경이로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 139,4)
또한,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1-2).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이사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사실, 그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리아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는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리해 버린다면, 요한의 탄생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제 몸에 새겨진 당신 소유의 이름을 드러내주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고
당신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소서.
오늘, 제 삶안에서 당신이 뜻하신 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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