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기도의 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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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3-06-24 | 조회수839 | 추천수7 | 반대(0) |
‘그리스와 터키’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4년 전에 가려고 했는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연기되었다가 이번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4년 동안 순례의 여정을 기다려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4년 전에는 54명이 신청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30명이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새삼 ‘바오로 사도’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칠 줄 모르는 선교에 대한 열정과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그리스와 터키로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습니다. 그 씨앗이 열매를 맺어서 굳게 닫혔던 로마의 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가장 강한 국가였던 로마의 길을 따라 ‘PAX ROMANA'는 ’PAX CHRISTIANA'가 되었고, 교회는 오랜 박해의 터널을 지나 유럽문명의 토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을의 중심에는 ‘성당’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삶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사도들 중에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유일한 사도가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박해하였던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러 가는 길에서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이 워낙 강열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몇 번에 걸쳐서 바오로 사도의 체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사막에서 3년 동안 자신이 체험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는 예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복음을 선포했고 죽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면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복음 선포는 그리스와 터키에 전해졌고,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현실의 삶에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부활’은 희망이었고,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선포할 당시에는 아직 ‘복음서’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선교한 공동체를 격려하거나, 엄중하게 책망할 때 편지를 작성하였습니다. 그것이 신약성서의 한 부분이 되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입니다. 공동체가 분열 할 때는 일치할 수 있도록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동체가 이교도의 풍습에 빠져들 때는 엄하게 책망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동체가 성령의 감도로 성장할 때는 축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동체가 절망 중에 있을 때는 희망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업적과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과 계명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면 구원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생활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할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니 깨어서 준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에게서 두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학이라는 ‘틀’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심금을 울리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 글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삶의 ‘이정표’가 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여러 글들이 있지만 저는 오늘 고린토 전서 13장의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오늘은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린토인들에게 전해준 ‘사랑’의 축복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에게도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이 다리가 되어 평화와 자유가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이 다리가 되어 일치와 화해가 넘어오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하여 남과 북의 일치와 협력을 위해서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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