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민족의 화해와 일치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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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6-25 | 조회수476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민족의 화해와 일치 -평화공존-
오늘 2023년 6월25일은 연중 제12주일이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3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해 저는 2살이었기에 기억은 못합니다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전쟁후 50년대 힘들고 가난했던 생활은 생생히 기억합니다.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원수가 되어 완전히 갈린지 73년입니다. 예전 한때 애절히 불렀던, 그러나 지금은 거의 잊혀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생각납니다. 지금도 남북동포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곡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나라 살리는 통일, 이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 보니 6.25 한국전쟁에 대한 기사는 거의 없었고 단 하나, 부산-경남 지역 신문에 나온 <“한국전쟁 73년, 이젠 평화를”... 25일 곳곳서 미사, 기도회, 답사>란 기사만 구석에 작게 나와 있었습니다. 이젠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는 6.25 한국전쟁입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동족상잔의 전쟁입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고자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젠 평화입니다. 결코 꿈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민족통일, 남북통일입니다. 그러나 통일에 앞서 평화입니다. 평화공존이 우선입니다. 어느 학자의 지극한 이성적, 합리적 글에도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분단과 적대의 반대는 통일이 아니라 평화공존이다. 독재를 겪지 않은 청년들에게 세습독재와의 통일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다. 한국과 조선의 평화공존은 통일의 포기가 아니라 유예다. 독립공존을 거친 평화세대에 의해 통일 가능성은 더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통일이 목적이 되면 언젠가는 한국전쟁처럼 통일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
통일 대신 평화가 목적이 됐을 때 끝내 통일폭력을 넘어 평화공존을 구가할 수 있다. 한국전쟁 73년, 한국과 조선은 이제 국가대 국가로서 보편의 지평에서 만나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마침내 항구 평화를 향유할 수 있다.”(박명림)
그렇습니다. 통일이 아니라, 전쟁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평화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산상설교에도 명시적으로 진복팔단의 참행복중 하나로 선언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또 우리는 자랑스럽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에페2,14)라고!
정말 남북통일이나 남북평화에 우선되야 할 것은 남남통일, 남남평화입니다. 우리 남한의 한국은 얼마나 내부적으로 산산히 분열되어 있는지요! 치열한 내전상태를 연상케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까닭이나 사연들로 죽어가고 있는지요! 지금도 생존을 위한 치열한 생존경쟁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까이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부터 통일이, 화해와 일치가, 평화공존이 우선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델이 여기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수도원 본원 숙소 명칭은 “자비의 집”, 자매들 개인 피정집 명칭은 “평화의 집”입니다. 또 수많이 분들이 주님의 평화가 목말라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어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분이 전송해준 메시지도 반가웠습니다. 전문을 인용합니다.
-‘평화와 쉼, 아름다운 성가로, 기도로 이루어진 자연에 가까운 요셉수도원! 몇 년전에 한 무리로 다녔던 이름도 예뻤던 개들! 기도와 일! 인생 참 단순하네요(행동과 최고가치의 동행). 수사님과의 면담, 남편의 외도,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30년동안 살면서. 수사님의 끊임없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갈망들... 수사님의 답변, “아내의 믿음이 깊어져서 향기가 나면 남편을 저절로 돌아올겁니다.”인생 달인의 대답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수사님이 계셔서. 또한 우리에게 평화의 집을 허락해 주셔서. 건강하시고 시간들이 기쁨, 행복 가득하기를 아멘!!’
‘아내의 믿음이 깊어져 향기가 나면 남편은 저절로 돌아온다’, 제가 언제 이렇게 멋진 말을 했는가, "인생 달인" 이라니, 감격했습니다. 무명의 아름다운 메시지에 감동하여 ‘진선미’라 작명하여 저장해 뒀습니다. 이런 평화로운 수도공동체 분위기라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지요! 어느 화가 자매의 요즘 동향도 인상적이라 주고 받은 글도 나눕니다.
“저는 요즘 ‘사랑의 찬미’라는 주제로 돌고래 소재를 그리고 있어요.” “기막힌 착상이 참 좋습니다. ‘사랑의 찬미’ 역시 참 좋은 하늘에 보물 쌓기입니다. 한결같이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선물처럼 주어질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남북의 평화공존을, 또 내 가까이서부터 평화공존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말씀에서 답을 찾았으니 기도와 사랑, 그리고 경청입니다.
첫째,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 역시 참 좋은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그리고 ‘간절하고 항구하게’가 기도의 원리입니다. 홀로의 개인기도도 좋지만 마음이 하나된 함께의 공동기도는 더욱 좋습니다.
우리의 광야 인생 순례 여정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together)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개인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임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두명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고마운 가르침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교회공동체의 믿음이 고맙고, 미사경문중 제가 특히 사랑하는 대목입니다. “주님,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기도문의 위치도 절묘하게 주님의 기도와 성체를 모시는 영성체 사이에 나옵니다.
둘째,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도 배워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공부해도 우리는 영원한 초보자일뿐입니다. 사랑 역시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사랑하면 행복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은 사랑이자 말씀입니다. 결코 무지도 허무도 욕망도 아닙니다. 그러니 평생 말씀을, 사랑을 공부하고 실천할 때 참나의 실현입니다. 이 사랑공부 소홀로 급기야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이, 폐인이 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은 구체적이요 현실적입니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제1독서 에페소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 참 고맙고 적절합니다. 우선 말로서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선 안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다음엔 용서의 사랑입니다. 용서야 말로 신적 사랑, 하느님의 자녀다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끊임없는 용서의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내가 살기위해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숨쉬듯이, 밥먹듯이 지칠줄 모르는 용서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점에서는 바오로 사도 역시 일치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용서받았기에 용서입니다. 새삼 사랑의 용서도 은총임과 동시에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아름답고 멋집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셋째, 경청하십시오. 사랑의 경청입니다. 사랑의 경청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경청의 사랑입니다. 귀기울여 듣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사랑의 경청입니다. 경청 역시 의식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경청의 선택, 경청의 훈련, 경청의 습관,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 모세의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를 격동시킵니다.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마음 속으로 뉘우치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돌려 주실 것이다.”
강조되는 바, “오늘”이요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이라는 말마디요 운명을 바꿔주실 것이란 약속입니다. 하느님은 곡선으로도 똑바로 쓰실 수 있는 분입니다(God can write straight with crooked lines). 참으로 사랑의 경청,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에 시종여일始終如一할 때 우리의 운명도 바뀔 것이요, 굽어진 곡선 인생도 똑바로 펼쳐질 것입니다. 마침 게시판에 붙은 시편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옳거니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나이다.”(시편34,6)
오늘 주님은 고맙게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공존을 위한 길을, 또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1.기도하십시오. 2.사랑하십시오. 3.경청하십시오.
기도도 사랑도 경청도, 참 좋은 은총이자 거룩한 선택이요. 거룩한 훈련이자 거룩한 습관입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 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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