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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남북통일 기원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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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6-25 조회수221 추천수3 반대(0) 신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남북통일 기원미사] 마태 18,19ㄴ-22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아프리카의 한 정글에서 생물학자들이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곳에 사는 많은 종류의 짐승들을 한 종류씩 없애보기로 한 것입니다. 먼저 새를 없애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글은 마치 공동묘지처럼 적막한 숲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원숭이들을 쫓아냈습니다.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나뭇가지를 꺾어 숲을 망가뜨리는 원숭이는 필요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숭이가 사라지자 나무 가지들이 서로 어지럽게 뒤엉키면서 햇볕을 가려버려 땅이 썩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징그럽고 위험한 뱀들을 다 제거했습니다. 그러자 천적이 없어진 쥐들의 개체수가 급격히 늘었고 그로 인해 해충을 잡아먹던 큰 벌레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학자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 ‘필요 없는’ 것은 없으며, 그들이 모두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만 생물 전체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런 점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가 서로를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며 함께해야 모두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벌써 7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뿌리 깊은 오해와 갈등,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바로 한국전쟁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채 유지되고 있는 대치상황 때문입니다. 그 역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슬픔과 아픔들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적대심을 드러내면서, 상대방을 멸망시켜야만 내가 사는 것처럼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인 상황이지요. 하지만 한 민족 한 핏줄인 우리는 서로 평화롭게 어울려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되새기며 한민족의 참된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매년 6월 25일 오늘 성경에 기록된 용서의 메시지를 읽고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여 참된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그러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욕심과 고집에 사로잡혀 당신을 떠난 이들이 언제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당신 품으로 되돌아오기를 목놓아 기다리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언제 당신을 찾아가도 언제든 용서하실 수 있도록, 죄라는 무거운 짐을 가득 지고서 당신께 나아가는 우리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 계시지요.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대체 나에게 왜 그렇게 하였느냐’고 잘잘못을 따지고 벌을 내리시는게 아니라, 당신 자녀인 우리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 곧 당신 사랑의 품을 되찾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우리가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다는 이유로 형제를 미워하고 배척한다면, 그들을 용서하기를 거부하여 그들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을 가로막는다면, 그건 우리를 공평하게 사랑하시고 우리 모두의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가슴아프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을 멈추고 일치와 평화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일치의 길은 ‘마음을 모으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와 여러가지로 ‘다른’ 누군가와 마음을 모으기란 참으로 어렵지요. 듣기 싫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지키고 싶은 고집과 신념을 꺾어가며, 불이익과 희생까지 감수하는,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포기와 양보, 용서와 사랑, 이해와 배려가 그와 나의 마음 속에 스며들어야 비로소 그 마음의 밭에서 일치와 평화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겁니다. 그 노력이 얼마나 힘들고 눈물겨운지를 아시기에, 주님은 우리가 마음을 모아 당신께 바치는 기도를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어렵게 하나로 모아진 그 소중한 마음이 실망과 좌절 속에 흩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당신께 대한 믿음 안에서 ‘한 마음’으로 드리는 청원을 반드시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참된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가 엉뚱한 질문으로 예수님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하느냐고 그 ‘한도’를 물은 것입니다. 그의 물음에서 그가 ‘형제’라고 부르는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즉 형제는 여러 실수와 잘못으로 자기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죄’를 짓는 골치아픈 존재이고, 그보다 더 나은 존재인 자신은 그에게 넓은 아량으로 용서라는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그래서 여러가지로 손해를 보는 억울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디 베드로만 그러겠습니까? 우리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잘못, 허물과 단점을 보면 그것을 일일히 지적하고 비난하며 심지어 직접 단죄하려 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 식으로 구는건 내가 그보다 더 잘났다고, 더 의롭다고, 더 올바르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 때문에 자기 마음 안에 더 큰 죄를 쌓으며 살고 있다는건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을 보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바라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자신과 남을 바라보는 사람은 타인의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어서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또한 그가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을 나 또한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바로잡는 계기로 삼습니다. 그러면 그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먼저 그에게 용서를 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멀게는 저 북녘에 있는 동포들을, 가깝게는 나와 부대끼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들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그렇다는건 나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도 하느님께서 오롯이 사랑하고 계신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부드럽고 넓은 마음을 주시기를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따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를 마음에서부터 용서해야 합니다. 몇 번까지만 한계를 두고 봐준다거나 특별한 조건을 채워야만 용서해주겠다는 옹졸한 마음을 버리고 그를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 우리가 청하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거창한 목표는 먼저 가까운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하신 말씀에 비추어 나를 돌아보고,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행동으로 삶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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