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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3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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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7-02 조회수314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13주일 가해] 마태 10,37-4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집안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 선한 일이 좋은 일입니다. 그런 일을 내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기쁘게 해야 좋은 일입니다. 그런 좋은 일을 하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더 좋은 몫으로, 내가 되질한 그 되에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더 귀한 선물로 돌려주십니다. 그런 믿음으로 이웃 형제 자매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맡겨진 사랑의 소명입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그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인 열왕기 상권을 보면 ‘수넴’이라는 고을에 살던 한 여인이 엘리사 예언자를 자기 집에 귀한 손님으로 모셔들이고 따뜻하게 환대합니다. 그녀가 엘리사를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보내신 거룩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걸 얻어내기 위해 아부를 하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그분을 섬기는 일 자체를 큰 기쁨과 영광으로 여겼기에 기꺼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 그녀의 순수한 믿음과 사랑이 하느님께 가 닿았고, 그분으로부터 큰 보상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내어드린 것을 더 큰 수준으로 돌려주시는 분입니다. 그녀가 ‘나그네’ 처지였던 엘리사를 맞아들여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한 것은 그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운 일이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보다 더 큰 생명을, 자식 없이 쓸쓸하게 살던 그녀에게 귀한 아들을 선물로 주신 겁니다.

 

그런데 내가 만나는 모든 이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여기며 맞아들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관계’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특별하게 여기며 그를 나와 맺는 유일한 관계 안에 묶어두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혹여 그가 나보다 다른 이와의 관계 쪽으로 기울어지는거 같으면 그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다고 여겨 실망하고, 그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지요. 관계에 대한 집착이 결국 그 관계 자체를 파괴해 버리는 아이러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아들이나 딸을 당신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예수님이 사랑에 있어서 질투가 매우 심한 분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사랑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필레오’로서 누군가에게 매력과 호감을 느끼며 애착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처럼 호불호에 따라 쉽게 달라지며, 상대방을 소유하고 집착하려 드는건 주님께서 강조하신 참된 사랑의 모습이 아니지요. 결국 ‘가족을 당신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주님의 말씀은 신앙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가족을 소홀히 여기라는 뜻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가족간의 사랑에서도 욕망과 집착을 비워내고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제대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대로 휘둘러도 되는 내 소유물이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니, 그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안에 온전히 받아들이고 존중하며 아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참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존중과 수용의 가치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연결시키십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를 진정으로 사랑하여 자기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되고, 사랑과 희생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받아들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데코마이’는 ‘환영하다’, ‘인정하다’, ‘인내하고 참아주다’라는 뜻입니다. 즉 누군가를 내 안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를 기쁘게 환영하고, 그가 살아가는 방식과 가치관을 인정해주며, 나와 다른 점들 그래서 나를 불편하고 힘들게 만드는 점들을 인내하고 참아주는, 다시 말해 상대방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희생하는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해야만 가능한 일인 겁니다. 그리고 그런 대단한 사랑을 실천한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소유하고 당신과 함께 참된 기쁨을 누리는 엄청난 특권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랑의 방향이 내가 아닌 그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방향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저 사람에게 내가 베풀어야 하는 것이 그냥 물 한 잔이 아니라 ‘시원한 물 한 잔’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단순히 내가 주고 싶은걸 주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그를 위해 물 한 잔을 시원하게 만들려고 노력해야만, 즉 그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리며 그에게 더 큰 기쁨과 도움을 주도록 정성을 다해야만 내가 그에게 베푸는 사랑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며, 그렇게 완성한 사랑은 이 세상에서는 큰 기쁨이 되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약속이 될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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