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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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7-08 | 조회수434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마태 9,14-17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유다인들은 보통 1년에 한 번 단식합니다. 레위기 16,29-31에 기록된 ‘속죄일’ 규정에 따라, 자기가 저지른 죄를 씻고 정결해지기 위해 단식이라는 재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그보다 더 자주 단식했습니다. 몸과 마음의 상태를 깨끗하게 유지하여 종말이 닥쳐왔을 때 구원받을 수 있도록 ‘정결례’ 예식의 일부로서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의 단식을 실천한 겁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참으로 한심해보였습니다. 세리나 죄인 같이 질 나쁜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며 먹고 마시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스승이 얘기한 것처럼, 예수라는 분이 정말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가 맞다면 그래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비판적인 어조로 따지듯이 예수님께 질문하지요.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참된 단식은 그저 자기 몸과 마음을 깨끗이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사는 이들이 자기 구원을 위해 들어두는 ‘보험’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여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행동과 삶으로 드러낼 수만 있다면 굳이 힘들게 굶는 방법을 택하지 않아도 상관 없었습니다.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힘든 티를 팍팍 내며, 밥을 굶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고 단죄하려 든다면 그건 오히려 단식의 근본 정신에서 한참 벗어나는 폭력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전혀 누리지 못한 채,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게 뻔했습니다. 그런 점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유다 사회에서 누군가가 혼인을 하면 가까운 친지들과 이웃들을 불러 일주일 동안 큰 축제를 지냈습니다. 그 때에는 율법의 모든 의무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와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보내는 그 시간을 혼인잔치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구원을 준비하기 위한, 깨어있는 자세로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극기’로서의 단식은 이제 끝났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지금은 서로를 향한 비난과 단죄 속에서 슬프게 보낼 때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함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누려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그 ‘때’를 잘 식별하여 하느님의 뜻과 의도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 때 더 잘해줄걸’하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그와 함께 보내는 ‘현재’라는 시간이 주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도록,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사는 방법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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