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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4주일 가해] 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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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7-09 조회수431 추천수3 반대(0) 신고

[연중 제14주일 가해] 마태 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쉽고 편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 세상이 권하는 여러 ‘스펙’과 ‘조건’들을 갖추려고 애를 쓰지요. 그런데 이 ‘쉽다’라는 말이, ‘편하다’라는 개념이 너무나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서 문제입니다. 살면서 마주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수월하다면 ‘얼마나’ 수월한지, 세속의 물질과 권력으로 누리는 삶이 편하다면 ‘얼마나’ 편한지 그 정도를 객관적인 지표로 나타내는 것이 불가능한 겁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삶의 문제에 대처한다고 해도 어떤 사람은 거기서 큰 어려움을 느끼며 고생하고 어떤 사람은 한 번에 쉽게 해결해 버립니다. 심지어 동일한 사람이 똑같은 문제를 똑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에도 그가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어떤 때엔 수월하고 또 다른 때엔 어렵기도 합니다. 그런 점은 ‘편하다’라는 느낌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이 주는 것들은 그것이 아무리 쉽고 편해 보여도 우리를 참된 기쁨으로 이끌지 못하니, 우리가 삶의 어떤 문제도 수월하게 해결하도록 도와주실 수 있는 절대적인 분을,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진정한 ‘편안함’을 찾아야 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 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나 분명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당신과 함께 하면서 당신 뜻을 따라야만,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수월하게 해결하여 참된 편안함을 누릴 수 있다고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드시는 예가 ‘멍에’의 비유입니다. 멍에는 소나 말의 어깨에 씌운 뒤 거기에 쟁기를 매달아 끌기 위해 구부러진 모양으로 만든 기구를 가리킵니다. 소의 어깨 너비에 딱 맞게 만들더라도 딱딱한 나무로 되어 있기에 그것에 눌리면 아픕니다. 게다가 거기에 무겁고 큰 쟁기까지 매달면 훨씬 더 강한 힘이 어깨를 짓누르기에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지요. 그러니 소의 입장에서는 그 멍에가 절대 편할 리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멍에가 편하다고 하시니, 도무지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농부들이 사용하는 멍에의 구조를 알고 나면, 예수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농부들이 사용하는 멍에는 한 마리의 소가 하나의 멍에를 지는 구조인반면, 이스라엘 농부들이 사용하는 멍에는 두 마리의 소가 하나의 멍에를 지는 구조입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두 마리의 소가 하나의 멍에를 함께 지고 가니 혼자 지고 갈 때보다 훨씬 더 편하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두 마리의 소 중 한 마리가 체격이나 힘, 쟁기질을 하는 숙련도에서 월등히 앞서 있다면, 그 멍에를 함께 메고 가는 다른 한 마리의 소는 쟁기질을 하기가 너무나 수월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고 가라고 권하시는 멍에가 바로 그런 멍에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함께 메는 멍에입니다. 나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멍에를 메고 가시니 그 옆에서 함께 가는 나는 보다 수월하게 삶이라는 쟁기를 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뜻을 따르는 것이 당장은 더 힘들고 고생스러워보여도 내 몸 하나만 건사하려고 하기보단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이 삶의 난관을 보다 수월하게 헤쳐나가는 방법입니다. 농부가 멍에를 붙들고 소를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가듯,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멍에를 메고 우리를 ‘하느님 나라’라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당신은 멍에를 메셔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멍에를 메고 함께 가주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멍에가 왜 이리 불편하고 아프냐고 그분께 투정부릴 수가 없습니다. 함께 메 주시고 함께 가 주심에 감사하는 게 먼저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당신 멍에에 매달고 가는 그 ‘짐’이 가볍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도 이해하기 참으로 힘이 듭니다. 당신은 전능하신 ‘주님’이시니 그 까짓 짐 하나 드는게 뭐가 힘드시냐고, 하지만 나약한 존재인 우리 인간은 작은 짐 하나 끌고 가는 것도 정말 죽을 만큼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짐이 ‘가볍다’고 하신 것은 그분의 대단한 신적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마음가짐 덕분인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부정적인 상황이 닥쳐도 쉽게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닥친 일에 대해 짜증을 내기 전에, 먼저 그 일이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지,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따져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하지요. 그러니 같은 일이라도 더 수월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한편, 마음이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두고 자기의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내가 하고 싶은대로만 하려고 하면, 내 기준에만 맞추려고 억지를 부리다보면 충분히 잘 할 수 있는 일들도 꼬여버림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하느님의 기준’으로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그런 일을 겪게 하신 이유와 의미가 무엇인지, 그분 뜻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자기가 무엇을 해야할지를 생각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면서 그로 하여금 하느님 당신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 은총과 도움들을 주시기에 자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가 훨씬 더 가볍게 느껴지는게 당연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멍에를 함께 지고가며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자신에게는 ‘좋은 일’만 있어야 한다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임하면, ‘도대체 왜 나만 이렇게 힘든거야?’라는 부정적인 마음으로 임하면, 내가 지고 가는 멍에와 짐은 더 고통스럽게 나를 짓누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런 일을 겪게 하시는데에는 다 이유와 뜻이 있겠지’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진 상황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고통이 서서히 잦아듭니다. 또한 ‘세상에 이만큼도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 그래도 이정도인걸 감사하며 살아야지’라는 온유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씩씩하게 어려움들을 이겨낸다면, 내 어깨를 짓누르던 멍에가 나를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드높여줄 ‘명예’임을, 내가 힘겹게 끌고 가던 그 짐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행복들로 가득 찬 보물상자임을 깨닫게 될 겁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주겠다고 하신 것은 ‘휴식’이 아니라 ‘안식’입니다. 휴식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쉬는 것입니다. 공부든 노동이든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은 그것을 잠시 멈추고 쉴 수 있습니다. 그 ‘쉼’을 통해 마음과 체력을 충전하여 다시 일할 수 있도록 회복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구원의 여정은 힘들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쉴 수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내려놓은 채 ‘빈 마음’으로 있으면, 악한 세력이 우리를 차지하여 멸망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잠깐 쉬고 다시 일해야 하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쉼에 안주하지 말고, 구원의 여정을 끝까지 잘 마무리한 다음에 하느님 품 안에서 편안하게, 어떤 걱정이나 부담없이 온전하게 푹 쉬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편안함, 즉 ‘안식’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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