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5주일 가해, 농민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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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7-16 | 조회수491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15주일 가해, 농민주일] 마태 13,1-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한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꽃은 어디에서 태어났어요?” 엄마가 대답합니다. “꽃씨에서 태어났단다.” 꽃씨를 잘라본 아이가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는 꽃이 없는데요?” 엄마가 대답합니다. “꽃씨 안에 꽃은 분명 있단다. 그러나 바람, 햇살, 비, 구름이 도와주어야 한단다.” 아이는 엄마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책을 읽고, 음식을 먹으면서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호승 시인이 쓴 “꽃씨”라는 글에 있는 내용입니다. 비단 꽃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들은 모든 조건이 갖춰지고 완성된 상태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씨”의 모습으로 태어나 다른 이들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어른’으로 자라고, 다양한 경험과 노력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 심어주신 가능성을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가지요.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은총의 씨앗을 가꾸는 우리의 노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고 말합니다. 당신께서 마음에 품으신 모든 뜻을 현실에서 이루어지게 만드시는 그분의 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에서 드러나듯, 전능하신 하느님의 의지는 그분의 입에서 발설되는 ‘말씀’을 통해 즉시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실’이 되지요. 오늘의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는 그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나타내는지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그런데 이렇게나 강력한 하느님의 말씀이 온전히 실현되지 않는 유일한 피조물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스스로의 선택과 결단으로 당신 뜻을 받아들이고 따를 수 있는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를 준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으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서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며 자라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걸 잘 아시면서도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말씀의 씨앗, 은총의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내 마음이 커다란 가시덤불에 막혀 있어도, 내 마음 안에 완고함과 고집의 돌덩이들이 가득해도, 심지어 내 마음이 길바닥처럼 딱딱하고 메말라 있어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농부가 열매를 얻게 되리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씨를 뿌리듯, 하느님은 당신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자신감으로, 당신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만드신 우리의 가능성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당신 자녀인 우리가 반드시 구원이라는 결실을 얻게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로 은총의 씨앗을 충만하게 뿌려주십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서 뿌려주신 씨앗이 내 삶 속에서 제대로 자라 열매맺지 못한다면 그건 우리 마음 상태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속 비유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런 우리 마음 상태를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길”은 자기 일 말고는 다른 그 무엇에도 신경쓰지 않는, 철저한 무관심과 개인주의로 딱딱하게 경직되어 버린 마음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살면 하느님께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들려주셔도 다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립니다. 건성으로 들으니 마음에 남는게 하나도 없고, 마음 속에 하느님의 뜻을 품고 있지 않으니 그분과 아무 상관없는 ‘남’처럼 제 멋대로 막 사는 것이지요. 그런 모습으로 사는 이들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들을 이용하는 사악한 세력의 먹잇감이 되고 맙니다.
“돌밭”은 고집과 완고함이라는 돌덩이가 가득한, 그래서 다른 이를 잘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좋아서 일단 받아들이기는 하는데 딱 거기까지입니다. 마음 속에 신뢰라는 토양이 부족하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깊게 뿌리 내리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그분의 뜻을 열심히 실천해야 하는데, 하느님 말씀과 가르침대로 살다가는 자신이 손해를 보거나 고통을 겪게 될까봐 두려워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입’만 혹은 ‘발바닥’만 신자인 모습으로 사는 겁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 삶에 고통과 시련이라는 따가운 볕이 비치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신앙을 잃고 맙니다.
“가시덤불”은 먹고 싶고, 하고 싶고, 되고 싶고, 갖고 싶은 욕심이 가득한, 그래서 그 욕심을 채우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며 근심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 말씀도 일단 좋아보여서 ‘언젠가는 실천해봐야지’하고 마음의 ‘위시리스트’에 넣긴 하는데 정작 실천하진 못합니다. 날마다 더 새로운 것들, 더 화려하고 좋아보이는 것들을 마음에 담느라 하느님 말씀은 관심이라는 볕이 들지 않는 가장자리로 점점 밀려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걱정과 근심들에 짓눌리고 숨이 막혀 믿음은 마치 ‘화석’처럼 흔적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이들도 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열려있어 다른 이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공감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고집과 완고함이라는 돌덩이를 성찰이라는 망치로 잘게 부수고, 겸손이라는 체로 곱게 쳐서 다른 이의 말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좋고 싫음을 판단하지 않고 일단 자기 마음 안에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굳은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씨앗에 실천이라는 물과 희생이라는 거름을 충분히 주기에 참된 기쁨과 행복이라는 좋은 열매를 한가득 맺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좋은 땅’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 속 비유에는 한 가지 뻔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 ‘좋은 땅’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빚어 만드시고 사랑과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나쁜 땅일 리가 없지요. 다만 정성과 노력으로 가꾸지 않는게 문제입니다. 우리 마음 밭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하느님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면 ‘길바닥’에서 ‘밭’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완고함과 고집을 걸러내고 욕심과 집착을 비워내며 손해와 희생까지 감수하면 ‘좋은 땅’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노력의 과정은 한 번 하면 끝나는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꾸준히 계속해야 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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