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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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7-17 | 조회수398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마태 10,34-11,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가족을 우선적으로 챙기기 마련입니다. 가족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내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실수와 잘못들로 실망시키고 마음 아프게 하여 잠시 멀어질 수는 있어도, 결국 내가 다시 돌아갈 품은 가족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그토록 중요시하는 부모 자식간의 사랑보다 더 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하십니다. 바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며 보호하시고 심지어 대신 죽으시면서까지 사랑하십니다. 어떤 요구조건도 대가도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의 우리를,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십니다.
그렇기에 다른 부수적인 사랑들에 시선을 뺏겨 하느님과의 본질적인 사랑을 잃는다면 그건 살을 취하겠다고 뼈를 내주는 꼴입니다. 그렇게 잘못 사랑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마저 잃고 말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 가족, 내 지인의 안위만 추구하는 육적인 애착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진다고 해서 가족과 멀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우선한다고 해서 내 가정이, 내 세계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더 큰 사랑 안에서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포용하는 더 성숙된 사랑으로 결속될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인간적으로 익숙한 혈연, 지연, 학연은 물론이고 서로 영광과 이익을 주고받는 이해관계 안에 깊이 파묻혀 주변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습니다. 높게 쌓아올린 이기심과 개인주의의 담장 안에서 ‘우리만’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담장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나의 안락한 삶이 안정적으로 보장되는게 ‘평화’라고 착각하며 안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좋은 게 좋은’ 그런 피상적인 관계가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 눈을 가리우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그런 거짓된 평화는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제대로 새로 쌓아올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속적인 가치기준에 휘둘리지 말고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 바라시는대로, 그분처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는 ‘칼’처럼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안락하고 편한 이 자리에 눌러앉고 싶은 우리를 가시방석처럼 아프게 찌르기에 그렇습니다. 건드리기도 싫고 쳐다보기도 두려운 내 영혼의 환부를 과감하게 도려내기에 그렇습니다. 힘들고 괴로워서 귀찮고 부담스러워서 가기 싫은 길을 어서 빨리 가라고 재촉하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그리고 반드시 져야하는 것이 ‘십자가’라면 등에 지고 땅바닥에 질질 끌며 가는 것보다, 품안에 고이 끌어안고 가는게 낫습니다. ‘십자가 끌어안기’는 내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과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이를 하느님께서 나를 좋은 길로 이끌기 위해 보내주신 귀한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포용과 순명의 마음으로 사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 준비하신 특별한 상을 잃지 않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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